9장.
“배에 오른 첫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연회가 끝나자, 귀빈칸 사람들은 취기를 안고 각자 객실로 돌아갔다.
자오징윈은 객실 안에서 복도가 완전히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맞은편 꽉 닫힌 문을 한 번 바라본 그는, 소리 없이 양샤오산의 객실로 향했다.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한 자오징윈은 손을 뻗어 조용히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팡위, 린나, 양샤오산 세 사람은 각각 소파 한쪽을 차지한 채, 특별한 주제 없이 느슨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모두 일제히 허리를 펴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때, 작전은 잘 마쳤어?” 자오징윈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그럼요, 문제 없이 잘 마쳤습니다.”
훠웨이닝이 술에 젖은 옷을 입고 객실로 돌아가면, 반드시 욕실로 향해 몸을 씻을 것이다. 옆에서 기다리던 양샤오산은 이 틈을 노려 철사로 문 잠금을 비틀어 열었다. 힘껏 밀자, 백참나무 문이 천천히 열렸다. 급히 방으로 돌아온 훠웨이닝은 방어용 사슬을 걸 겨를이 없었고,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완벽한 은폐막이 되어 주었다.
양샤오산이 말했다. “시간에 쫓기느라 훠웨이닝 객실만 대충 봤는데, 아주 깔끔하게 정리돼 있더라고요. 뭐랄까, 보스하고 좀 비슷한 구석이 있던데요? 결벽증 같은……”
“내 어디가 결벽증이라는 건데?” 자오징윈이 참지 못하고 말허리를 잘랐다.
양샤오산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보스, 예전에 스스로 살짝 결벽증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건……됐다.” 자오징윈은 굳이 얽히지 않겠다는 태도로 말을 멈췄다. “그래서, 뭐 찾은 건 있어?”
“예상했던 대로예요. 옷을 꺼내 입고는 트렁크를 그냥 열어둔 채로 두고 갔어요. 안에는 정장 몇 벌, 책 몇 권, 여권과 지갑이 들어 있었고요. 전부 평범해 보였는데——” 양샤오산이 일부러 뜸을 들이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옷 밑에서 이런 걸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네모반듯한 황동 상자였다. 손바닥에 꼭 들어오는 크기로, 네 귀퉁이는 양각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세 개의 기계식 톱니가 포개지듯 맞물려 있었다. 매우 정교한 물건이었다.
자오징윈이 황동 상자를 받아들었다. 손에 쥐자 무게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아,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상자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제야 안쪽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작고도 가벼운 소리가 났다. 자오징윈은 무심히 톱니를 돌려보았다. ‘딸깍’ 하는 기계음이 날 뿐, 상자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자오징윈이 황동 상자를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이 위에 있는 게……기계식 자물쇠인가?”
“맞아요.” 양샤오산이 말했다. “아마 소형 금고일 거예요. 굉장히 정밀하게 만들어졌고, 서대륙제인 것 같아요.”
“열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걸요. 두 사람이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 연구해 봤는데, 강제로 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서요. 내부 메커니즘을 해제하는 방식이라면……시도해 볼 수는 있어요. 다만 아무리 서둘러도 보름은 걸리겠죠.”
린나가 말을 보탰다. “보름은 무리예요. 훠웨이닝은 이틀 안에 알아차릴 거예요.”
“내일 아침까지 이 상자를 훠웨이닝의 객실에 돌려놓지 못하면, 그가 곧 눈치챌 겁니다.” 팡위가 말했다. “사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안 돌려놓으면 그만이지.” 자오징윈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가 눈치채는 건 상관 없어. 문제는, 그가 움질이지 않을 때지.”
팡위가 웃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움직임이 있어야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니까요.”
자오징윈은 황동 상자를 작은 탁자 위에 올려두고,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저 안에 든 게, 그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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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류이이는 보물처럼 아끼는 장신구 상자를 품에 안은 채, 집사를 데리고 스추의 객실 문을 두드렸다. 객실 안에서 단장을 마친 스추는 류이이의 손을 잡고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류이이는 스추 옆에 바짝 앉아 식빵 한 조각을 접시에 올렸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여러 빛깔의 잼을 조금씩 덜어내, 꼬리가 말린 고양이 한 마리를 그렸다. 그녀가 오늘 머리에 달고 온 진주 장식과 꼭 닮았다.
“아저씨, 이거 봐 주세요! 제가 아저씨한테 드리는 고양이예요!”
스추는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낙서가 담긴 빵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이 고양이, 먹어도 될까?”
“그럼요!”
류즈제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일부러 물었다. “아빠 건 없니?”
“있어요, 다 있어요!” 류이이는 기꺼이 대답하며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었다. “셋, 넷, 다섯……어? 훠 아저씨는 왜 안 계시지?”
훠웨이닝이 스추와 함께 식당에 나타나지 않은 건 드문 일이었다.
팡위가 슬며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훠 박사님 오늘 아침에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직 못 뵈었거든요.” 스추가 말했다.
류이이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셈을 했다. 여기 있는 사람만 해도 벌써 다섯 마리 고양이를 그려야 한다는 걸 깨닫자, 작은 얼굴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일이 많다고 느꼈는지, 미간이 천천히 좁혀졌다.
류즈제는 웃는 얼굴로 타일렀다. “우선 밥부터 먹자. 하루에 하나씩 그릴 수 있으니까. 네가 다 그렸을 즈음엔, 아침이 다 사라져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니?”
그 말을 들은 류이이는 좋은 생각이라 여기며 환히 웃었다.
그녀는 치즈로 속을 채운 빵을 집어 들고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스추도 천천히 그 빵 조각을 먹어 치웠다. 위장이 점차 부드럽게 풀어져, 심지어 고기를 먹어 체력을 보충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여전히 깊은 잠에 들 수는 없었지만, 깨어나는 사이사이에 간신히 조금씩이나마 쉴 수 있었다. 때로는 몸이 조금씩 회복되는 듯했으나, 갑작스럽고 이유 없는 강한 구역질이 그를 다시 심문실로 끌어당겼다. 마치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처럼.
식사가 절반쯤 지나갔을 때, 훠웨이닝이 서둘러 식당에 들어섰다. 그는 평소처럼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려 애썼지만, 이마에 드리운 불안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훠 박사님,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기신 건가요?” 자오징윈이 차분하게 물었다.
훠웨이닝은 약간 긴장한 듯, 재빨리 대답했다. “아닙니다, 별일 아니에요. 방 안에서 조금 시간이 늦어졌을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자오 사장님.” 훠웨이닝은 고개 숙여 웃으며, 식사를 서둘러 계속했다.
류즈제는 먼저 조식을 마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다들 갑판 위로 산책 나가시겠습니까?”
훠웨이닝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함께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스추가 곁눈질로 그를 한 번 살폈다. 훠웨이닝은 순간 긴장했다. 그가 질문을 던질까 두려웠다. 다행히 스추는 금세 시선을 거두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류즈제가 다정하게 말했다. “중요한 일이 우선입니다. 훠 박사님, 괜히 죄책감 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다른 이들은 조식을 마치고 차례로 식당을 나서 주갑판으로 향했다. 그제야 훠웨이닝은 긴장을 완전히 풀었다. 그는 별로 입맛이 없었기에 간단히 몇 숟가락 먹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천천히 일어나 차양이 드리워진 본 갑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성 직원은 프런트 너머로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안녕하세요. 분실물 문의드리려고요.” 훠웨이닝이 말했다. “혹시 누가 황동 상자를 주워 맡긴 적 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잠시만요.” 그녀는 기록 장부를 꺼내 뒷장부터 차례로 넘기기 시작했다, “혹시 언제쯤 분실하신 건지 기억나시나요?”
“어제였습니다.”
여성 직원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말씀하신 물건은 접수된 기록이 없습니다.
“확실한가요? 다시 한 번만 살펴봐 주세요. 누락된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는 장부를 펼쳐 그의 앞으로 밀어냈다. “직점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훠웨이닝은 장부를 받아 들고, 손끝으로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훑었다. 첫 장까지 다 넘겨보고 나서야, 끝내 물건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장부를 덮어 그녀에게 돌려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귀빈칸 객실 담당자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후방 지원 부서는 상갑판 중앙의 선원 구역에 있습니다, 손님.”
훠웨이닝은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대계단을 내려가, 연이어 길을 물어가며 상갑판 쪽 후방 지원실 앞까지 찾아갔다. 사무용 탁자 앞에 앉아 있던 책임자는 공손히 일어나 맞이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손님?”
훠웨이닝이 말했다. “실례합니다. 귀빈칸 객실을 담당하는 선원분들께 여쭤봐 주실 수 있을까요? 황동으로 된 정사각형 상자를 보신 분이 있는지요. 누군가 단서를 제공해주신다면, 반드시 정중히 사례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근무 중이라, 정오 무렵 인원들이 모인 뒤에야 확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중식 이후에 답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럽시다. 식사 후에 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네, 객실 번호를 이쪽에 적어 주시겠습니까?”
훠웨이닝은 만년필을 건네받아 쪽지에 자신의 객실 번호를 적었다. 떠나기 전, 끝내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당부했다. “그 황동 상자는 제게 정말 소중한 물건입니다. 반드시 되찾을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든 감수하겠습니다. 제발, 꼭 신경 써 주십시오.”
책임자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서둘러 답을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제야 훠웨이닝은 근심 어린 얼굴로 자리를 떴다.
오전 내내 그는 불안감에 짓눌려 아무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정오가 되어 간신히 식탁에 앉았을 때도, 입맛이 돌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자신이 초조한 기색을 얼마나 드러내고 있는지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흑석공사 소속의 네 사람은, 그런 그의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팡위는 그 틈을 타 한 마디쯤 던져볼까 했으나, 자오징윈이 조용히 눈짓을 보내 그를 말렸다. 그렇게 중식은, 별다른 일 없이 조용히 마무리 되었다.
식시가 끝나자마자, 훠웨이닝은 곧장 객실로 돌아와 소식을 기다렸다. 좀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방 안을 끊임없이 서성이다가, 마침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재빨리 문을 열었고, 후방 책임자의 사과 섞인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모든 선원에게 확인해보았으나, 황동 상자와 비슷한 물건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미 관련 내용을 전달해두었으니, 이후 단서가 발견되는 즉시 가장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훠웨이닝은 간신히 한마디를 짜내듯 대답했다. 책임자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떴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힘이 빠진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란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그 작은 황동 상자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끝내 떠올릴 수 없었다.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트렁크를 정리하고, 황동 상자도 확인하는 게 그의 습관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상자는 마치 허공으로 증발하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당황한 그는 트렁크를 통째로 뒤엎고 안에 든 옷가지를 모조리 꺼내 하나하나 뒤졌지만, 결국 남은 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애써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가장 가능성 있는 상황은 어젯밤이었다. 술을 뒤집어쓴 뒤 젖은 옷을 갈아입으려고 욕실에 들어갈 때, 옷가지에 휘말려 상자가 함께 딸려 나갔을 수도 있다. 그렇게 짐작한 그는 객실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아직 이 배 안에 있을 것이다.
설마, 도둑맞은 걸까? 상자가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자, 훠웨이닝은 몸 깊은 곳부터 서늘한 절망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스추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스추에게만큼은 이 상자의 존재를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훠웨이닝은 한참을 망설이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객실 안을 두루 살폈다. 구석구석, 작은 틈새까지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꼼꼼히 뒤져보기로 결심했다.
막 움직이려는 찰나, 뒤쪽 객실 문이 살며시 두드려졌다.
그는 가슴속에 희미한 희망을 품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에는 후방 책임자가 아닌 자오징윈이 서 있었다. 그는 공손히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훠 박사님.”
“자오 사장님, 무슨 일입니까?” 훠웨이닝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별일은 아닙니다. 오늘 오후 시간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훠웨이닝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눌러담고 객실 문을 닫은 뒤 그를 따라 나섰다.
자오징윈은 스추의 방 앞에 이르러 잠시 멈칫한 후,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객실 문이 열리자, 스추는 자오징윈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더욱이 그 뒤에 훠웨이닝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이 조합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요?”
“어젯밤 말씀드린 거래에 대해 생각해보셨습니까?”
스추가 말했다. “도착까지 며칠 남지 않았는데, 그렇게 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급하지 않습니다.” 자오징윈이 답했다. “팡위와 상의한 결과, 우선 저희 측이 준비한 장비를 확인하신 후에 논의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지금 양샤오산 씨 객실에 짐을 모아 두었는데, 시간이 되시면 한 번 확인하러 가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스추가 훠웨이닝을 한 번 바라보며 물었다. “훠 박사도 함께 가시나요?”
훠웨이닝은 대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중요한 일임을 직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스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출발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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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징윈이 그들을 이끌고 양샤오산의 객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팡위, 린나, 양샤오산 세 사람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훠웨이닝은 인사를 돌릴 겨를도 없이,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둥근 탁자 위의 작은 황동 상자를 발견했다. 그는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다급히 탁자 앞으로 달려가 상자를 집어 들었다. 흔들어보고, 이리저리 살펴본 끝에 그것이 자신이 잃어버린 그 상자이며, 다행히도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슴 깊숙이 틀어막혀 있던 숨이 그제야 비로소 빠져나왔다. 여전히 가슴이 쿵쾅대는 가운데, 훠웨이닝은 안도와 의아가 뒤섞인 눈빛으로 객실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상자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어젯밤, 복도에서 주운 건데요.” 양샤오산이 나서며 말했다. “혹시 훠 박사님께서 잃어버리신 물건인가요?”
“네, 하루 종일 찾아 헤맸는데, 선생님 덕분에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다만 바로 돌려드릴 순 없습니다.” 양샤오산이 그의 팔을 막았다. “양해해 주세요. 박사님 인품은 믿고 싶지만, 이 상자는 누구 눈에도 꽤 귀중해 보입니다. 박사님께서 직접 여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겠죠.”
훠웨이닝이 머뭇이며 물었다. “……어떻게 증명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간단합니다! 여기 기계식 잠금장치가 있잖아요. 직접 여시면, 그게 박사님의 증명이 되는 겁니다.”
그 순간, 기계식 자물쇠 상자는 순식간에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다. 훠웨이닝은 상자를 손에 쥔 채 망설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1
자오징윈이 물었다. “훠 박사님, 그 안에 특별한 물건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특별한 건 없습니다. 그저 필름 한 통일 뿐입니다.” 훠웨이닝의 목소리에는 주저함이 묻어 있었다.
“필름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스추가 갑자기 물었다.
훠웨이닝은 온몸이 순간 경직되며 말문이 막혔다. “단지 몇 장의 사진인데……”
“나와 관련된 내용인가요?” 스추가 말을 끊었다.
훠웨이닝은 놀란 눈길로 스추를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황동 상자를 꽉 쥐었고,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자오징윈은 더는 참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두 분,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맞습니다. 당신과 관련된 일입니다. 나중에 꼭 설명하겠습니다.” 훠웨이닝이 이를 악물고 스추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금고를 되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더 묻지 말아 주십시오.”
“굳이 나중까지 미룰 필요는 없습니다.” 스추가 답했다. “흑석공사에서도 이번 임무에 관심이 많으니, 이참에 명확히 밝히는 편이 낫겠습니다.”
훠웨이닝은 눈을 부릅뜨고 스추를 바라봤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정식으로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군사정보국 작전처 소속의 스추입니다.” 스추는 여전히 태연한 태도로, 얼어붙은 훠웨이닝을 바라봤다. “더불어 저분의 신분은 위장된 것이 아닙니다. 보안국에서 공식 파견된……수행 요원입니다.”
“군사정보국?!” 린나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심지어 보안국까지?” 팡위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둘은 본래 앙숙 아닌가요?”
양샤오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와, 보스, 이번에 완전 다 까발렸네……”
자오징윈은 훠웨이닝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더니, 이내 스추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임무가 뭡니까?”
“배에 오른 첫날,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자오징윈은 머릿속으로 모든 대화를 빠르게 되새기며 물었다. “증기 비행선?”
“맞습니다. 양국이 협력하여, 우리 나라가 중심이 되어 투자하고 엘란티스 왕국이 제작을 담당한 증기 비행선입니다.” 스추가 대답했다. “첩보에 따르면 엘란티스가 제작 자금을 전쟁에 유용했고, 공정 상황을 허위 보고했습니다. 내각에서는 증기 비행선의 실제 진행 상황을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훠웨이닝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자오징윈이 다시 물었다. “작전 코드명은 무엇입니까?”
“지연(纸鸢)입니다.” 2
스추가 살짝 미소를 띠고 훠웨이닝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 박사님 차례입니다. 필름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 훠웨이닝은 침묵했다.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셨나 보군요? 대답하지 않으면 이 상자는 돌려받지 못할 겁니다.”
훠웨이닝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놀란 눈으로 양샤오산을 바라보았다. 양샤오산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훠웨이닝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여러 차례 생각한 끝에 솔직히 말했다. “임무 대상에 대해 파악해야 해서, 당신과 관련 인물들의 자료를 신청해 열람했습니다. 그 내용을 필름으로 촬영해 두었죠.”
스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관련 인물이라니?”
훠웨이닝은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보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한 당신의 전남편, 닝자오 부관의 자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오징윈은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지며, 작고 아담한 황동 상자를 응시했다.
“전남편?!” 린나는 또 한 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팡위가 팔을 세게 끌어당기자 간신히 억눌렀다.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하셨네요. 죽은 사람의 기록까지 빠짐없이 챙기신 건가요?” 스추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훠웨이닝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황동 상자를 꼭 움켜쥐었다.
“열어보세요.” 스추가 말했다.
“안 됩니다……이건 기밀 자료입니다. 허가 없이는 넘길 수 없습니다.” 훠웨이닝은 말을 잇는 동시에 문 쪽으로 천천히 물러섰다.
“내 자료를 내가 열람하는 데, 누구 허락이 필요합니까?”
“스 처장님.” 훠웨이닝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당신은 군인입니다. 규칙은 어겨선 안 된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스추는 웃었다. “정말 내가 당신을 죽일 엄두도 못 낸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순간, 훠웨이닝은 그것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그는 급히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그의 손바닥에 찌릿한 통증이 퍼졌다. 손바닥은 갑자기 허공으로 비었고, 작은 황동 상자가 바닥에서 덜컹거리며 굴러갔다.
훠웨이닝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자오징윈이 권총을 쥐고 있었고, 총구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황동 상자는 총탄에 맞아 휘어지고 움푹 들어가 있었다.
훠웨이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안전 상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오징윈이 다시 장전을 마치고 두 번째 총탄을 쏠 태세를 갖추려는 순간, 갑판이 불시에 크게 기울었다. 모든 사람이 제어할 수 없이 한쪽으로 휘청이며 넘어졌고, 작은 탁자 위의 꽃병은 굴러가다 ‘쾅’ 하고 깨져 산산조각이 났다.
사람들은 벽이나 가구를 붙잡아 겨우 몸을 지탱했다. 배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그들은 일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먹물처럼 짙은 바닷물이 출렁이고, 희미한 하얀빛이 번쩍였다.
그 폭발음은 배 밖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천둥 소리였고, 이어서 하늘을 뒤덮는 거센 바람과 폭우가 몰아쳤다.
경보 사이렌이 뒤따라 울려 퍼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배 전체를 메아리쳤다.
‘창룡호’는 유명해의 뇌우 구역을 통과 중이었다. 거센 폭풍우를 맞닥뜨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