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英 2025. 6. 8. 11:57
“새로 오신 역사 선생님이야. 이름은 량옌(梁彦)이라더라.”



여름 햇살은 늘 뜨거웠다. 아직 아침인데도 창문으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오징윈이 눈을 떴다. 창문 커튼이 걷히지 않아 살랑였고, 그 색과 무늬가 낯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니, 낯설면서도 깔끔하게 정돈된 가구들이 있었다. 그제야 여기가 여관임을 깨달았다.

유일한 짐은 소파 위에 놓인 짙은 갈색 가죽 서류 가방이었다.

오늘은 월요일이었다. 어젯밤, 아버지 자오청쥔이 서대륙에서 돌아왔고, 두 사람은 크게 다투며 불편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자오징윈은 자오청쥔과 한 지붕 아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 곧장 방으로 돌아와 가방을 집어 들었다. 집사와 하인이 막았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집을 나섰다.

그는 깊은 밤거리에서 특별한 목적 없이 한참을 걸었다. 지치자 근처 여관에 들러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다음 날 바로 학교에 가 수업을 들을 계획이었다.

욕실에서 간단히 씻고 나온 자오징윈은 무심코 겉옷을 걸쳐 입었다. 몸을 돌려 전신 거울을 마주 본 순간, 그동안 어딘가 어긋났던 느낌의 정체가 단번에 떠올랐다.

……망했다, 교복!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확인한 뒤, 책가방을 낚아채듯 집어 들고 서둘러 여관을 나섰다. 거리에서 달려오는 마차를 여구 잡아 타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대저택 문 앞에 이르자, 자오징윈은 발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그의 얼굴에 주저함이 어렸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문 앞 경비가 검은 철책문을 열고 나와 맞이했다.

“우리 아버지는요?” 자오징윈이 본관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르신께서는 아침 일찍 나가셔서, 지금은 안 계십니다.”

“아.” 자오징윈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안으로 들어섰다.

연남공학(雁南公学)의 교복은 이미 다림질되어 그의 옷방 안에 말끔히 걸려 있었다. 새하얀 셔츠에 검은 긴 바지를 맞춰 입고, 그 위에는 짙은 검은색의 좁은 소매와 넉넉한 품의 재킷을 걸쳤다. 가슴팍에는 금실로 기러기 모양의 교표가 수놓여 있었고, 검은색과 금색이 교차된 넥타이 위에도 같은 기러기 문양이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자오징윈은 단정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책가방을 다시 챙겼다. 곧바로 사륜마차에 올라 학교로 향했다.

연남공학은 선경 북쪽, 개양구에 위치한 사립 학교였다. 현윤 황제 개혁 시기에 설립된 이 학교는 연산(雁山)을 등지고, 송림호(松林湖)를 끼고 있어 주변이 한적했고, 넓은 부지와 해마다 높은 학비로 명망가와 상류층 자제들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자오징윈은 학교의 높게 솟은 대리석 아치문 앞에 도착했다. 교내는 한산한 분위기였고, 마침 수업 시간이었다. 그는 문지기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 뒤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서두를 것 없다는 생각에 천천히 캠퍼스를 지나 교사동으로 향했다. 마침 그때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그는 그 틈을 타 동급생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들 듯 교실에 들어섰다. 자리에 책가방을 내려놓자, 친한 몇몇 친구들이 둥글게 모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가까이 있던 쑹하오첸(宋浩辰)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말했다. “징윈, 어젯밤 우리를 왜 이렇게 바람맞혔어?”

“10반이랑 당구 치기로 했잖아. 우리 다 네가 마지막에 오는 거 기다렸는데.”

“맞아, 나는 내기까지 걸었는데 네가 안 와서 이번 달 용돈을 다 날렸잖아!”

“미안.” 자오징윈이 말했다. “어젯밤 집에 일이 좀 있었어.”

“또 자오 삼촌하고 싸운 거야?” 쑹하오첸이 물었다.

자오징윈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아 옆에 있던 남학생에게 말했다. “이번 달 밥은 내가 살게. 어젯밤 약속 깬 벌로, 괜찮지?”

“그건 안 돼, 그렇게 쉽게 네가 그냥 넘어가게 둘 수 없지.” 맞은편에 있던 정위허(郑宇和)가 장난스레 웃으며 교탁 쪽을 가리켰다. “야, 저기 봐.”

자오징윈은 고개를 돌렸다. 교탁 뒤에 낯선 선생님 한 분이 앉아 있었다. 단정한 흰 셔츠 차림에, 몸의 반쯤이 거의 아침 햇살에 녹아들 듯했다. 선생님은 고개를 숙인 채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고, 쇄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새로 오신 역사 선생님이야. 이름은 량옌(梁彦)이라더라.” 쑹하오천이 말했다.

“게다가 대미녀야! 진짜 예쁘다고!” 정위허가 강조했다. “우리 아까 얘기하고 있었는데, 네 생각엔 선생님에게 남자친구가 있을 것 같아?”

“너희랑 무슨 상관인데.” 자오징윈은 시선을 거뒀고, 별 관심이 없었다.

“우리와는 상관없지만, 지금은 네가 신경 써야 할 일이 됐어.”

“무슨 뜻이야?”

“네가 올라다서 대신 물어 봐. 어제 안 나온 벌칙으로.” 정위허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애들도 곧장 웃으며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네가 가서 한번 물어 봐!”

“그건 좀. 남의 사생활 캐물어도 되는 거야?” 자오징윈이 난색을 표했다.

“그게 뭐가 무서워? 그냥 한 마디 물어보는 건데. 선생님이 말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잖아.”

“한 마디만 물어봐. 우리 방금 내기했어. 어쩌면 내 용돈,  곧 다시 따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다른 뜻은 없어. 이 정도 벌칙도 못 참으면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자오징윈은 교탁 위의 새 선생님을 힐끗 바라보며 망설였다.

“딱 한 마디만 물어보고 끝내자, 어때?” 정위허가 말했다. “상대가 대답하든 안 하든 네가 성공한 걸로 칠게. 그걸로 됐지?”

“이것마저 못 하겠다면, 그건 이제 얘가 우리랑 어울릴 생각이 없는 거지 뭐.”

이 말이 떨어지자 또다시 웃음이 터졌고,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말없이 통했다.

“……” 자오징윈은 이 말 저 말에 떠밀리듯 이끌려,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발을 떼어 교탁 쪽으로 향했다.

그는 말을 어떻게 꺼낼지 생각하며 느릿느릿 교탁 옆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럽게 몸을 약간 숙이고 목소리를 낮춰 다른 학생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 뒤, 최대한 실례되지 않게 말하려 애썼다. “저기, 선생님,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혹시 남자친구 있으신가요?”

새로 온 선생님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고, 자오징윈의 머릿속은 그 순간 새하얗게 비었다.

정위허가 말한 대로였다. 량옌 선생님은 정말로 곱고 단정한 인상이었고, 가는 은색의 금속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목구비는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자오징윈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그는 상대의 목덜미에 선명히 돋은 울대뼈를 보았다.

남자 선생님이었다!

자오징윈이 한 걸음 물러서서 고개를 돌렸다. 그 무리의 친구들이 한데 모여 웃고 있었고, 그 장난의 주범인 정위허는 책상 위에 거의 엎드릴 정도로 웃어대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와 조롱이 섞여 있었다. 자오징윈은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애초에 ‘남자친구가 있냐’고 묻는 건, 새로 온 선생님의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외모에 머리까지 길렀다는 점을 조롱하려는 의도였다.

그는 다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죄송해요.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학생. 자리로 돌아가세요.” 량옌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노트에 조용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말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으며, 어딘가 위축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자오징윈은 더는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죄책감으로 마음이 복잡한 채, 교탁 아래로 내려왔다. 쑹하오첸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가와 어깨를 툭치며 말을 걸었고, 그는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밀어냈다.

“장난 좀 친 거잖아. 왜 그렇게까지 화내고 그래?” 쑹하오첸은 그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재밌어?” 자오징윈이 그를 한 번 흘겨보고 자리로 돌아갔다.

“네 표정이 얼마나 웃겼는지 못 봤구나.” 정위허 옆에서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싱글벙글 웃었다. “작은 벌칙일 뿐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우리가 다 물어봤는데, 이 선생님은 별다른 배경이 없대. 교장 앞에 고자질하러 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자오징윈은 더는 할 말이 없어 단숨에 그의 손을 밀어냈다.

얼굴빛이 살짝 굳은 정위허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쑹하오첸은 그와 눈을 마주치고는 입을 삐쭉이며 자리를 떠났다. 방금 전까지 떠들던 몇몇 친구들도 자오징윈 때문에 기분이 상해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량옌이 일어나 특별한 말없이 모두에게 교과서를 펼치라고 지시하며 예정대로 수업을 이어갔다.

교탁 아래에선 책 페이지가 와르르 넘어갔지만, 진지하게 수업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 학년이다. 이 부유한 집 자제들 중 졸업을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부모들이 이미 그들의 앞길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해외 유학이든, 가업 승계든 말이다. 그래서인지 학생들 마음은 들떠 있었고, 학교에서도 조용할 수 없었다.

량옌은 오직 수업에만 집중했다. 학생들이 듣든 말든, 누가 수군대든 신경 쓰지 않았다.

자오징윈은 책에 적힌 글자를 응시했지만, 생각은 저절로 멀어졌다. 어젯밤의 다툼이 떠올랐다.

그때 그가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자, 긴 테이블에 앉은 자오청쥔이 보였다. 순간 놀랐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자오청쥔은 무심하게 서류를 넘기며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식당은 잠잠했고, 접시와 그릇이 부딪히는 가벼운 소리만 은은히 울렸다. 한참 뒤, 자오청쥔은 서류를 내려놓고 자오징윈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다. 학교 성적도 꽤 상위권이구나.”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자오징윈의 성적표였다.

“오늘에서야 제 성적을 알게 된 건가요?” 자오징윈이 물었다.

자오청쥔은 그런 반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대신해 올해 졸업 전까지 엘란티스 왕국 수도 사페르 대학 경영학부 지원서를 준비할 생각이다. 외국어 성적은 반드시 A등급을 유지하거라.”

“저는 가지 않아요.” 자오징윈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럼 어디로 가고 싶지?”

자오징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졸업 후의 미래가 막막했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건, 자오청쥔의 계획을 따르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자오청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오징윈, 너도 이제 열여덟 살이잖아. 법적으로 성인이 된 거야. 좀 성장했으면 한다.”

자오징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 어느 부분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거죠?”

“넌 번번히 내게 반항하려 들잖니.” 자오청쥔이 말했다. “내가 너를 먹이고 입혀 여기까지 키웠는데, 도대체 내가 어느 부분에서 널 실망시킨 거냐?”

“당신은 내게 잘못한 게 없어요. 다만 어머니께 잘못했을 뿐이죠.” 자오징윈이 말했다.

그 말이 자오청쥔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그는 단단한 원목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려쳤고, 충격에 그릇들이 덜컹거렸다. 낮게 목소리를 눌러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한다. 네 유치한 생각으로 우리 관계를 판단하지 마라.”

“아버지는 돈 말고는 관심도 없으시잖아요.” 자오징윈은 전혀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좋다. 그럼 똑똑히 들어. 돈 없으면, 나도 없고, 나 없이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오징윈은 이를 악물고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제 할 말 없나?” 자오청쥔이 냉담하게 물었다.

자오징윈은 자리에서 홱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집사는 ‘도련님’하고 연거푸 부르며 뒤따라가 말리려 했지만, 그 뒤로 자오청쥔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둬라. 저렇게 커서도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놈이니까.”

자오징윈의 걸음이 멈췄다. 따라붙은 집사의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그때, 시야 가장자리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오징윈이 정신을 가다듬고 돌아보니, 량옌 선생이 교과서를 조용히 읊조리며 교탁을 내려와 좌석 사이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

자오징윈은 펼쳐둔 책을 두 페이지 넘겼다. 깊게 숨을 들이켠 뒤,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량옌이 자오징윈 옆을 천천히 지나가다가, 문득 만년필 뚜껑 하나를 떨어뜨렸다.

자오징윈이 막 알려주려던 순간, 그 뚜껑이 데굴데굴 옆으로 굴러갔다. 옆자리에 앉은 정위허는 뒷자리 책상에 기대어 작은 소리로 이야기 중이었고, 의자 한쪽 다리가 살짝 들려 있는 상태였다. 그 뚜껑은 정확히 그 틈새로 굴러들어가, 의자 다리 아래에 딱 끼었다.

정위허는 의아한 표정으로 멈칫하며 이상함을 느꼈고, 고개를 숙여 한번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의자 다리가 뚜껑을 따라 굴러가 균형을 잃었고, 의자는 ‘쾅’ 소리를 내며 뒤집혔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크게 넘어졌고, 고개를 숙이다가 코가 책상 모서리에 세게 부딪혀 위아래로 한꺼번에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느 쪽을 먼저 살펴야 할지 몰랐다.

량옌이 놀란 듯 뒤돌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생, 괜찮니?”

교실 안 학생들은 고개를 돌려 평소 자랑하던 정위허가 이 꼴이 된 모습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뭘 웃어!” 정위허는 코를 한 손으로 가리며 화가 나서 책상을 쳤다.

그가 화를 낼수록 사람들은 더 크게 웃었고, 반면 량옌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부주의했니? 보건실에 데려갈까?”

자오징윈도 따라 웃으며 몸을 숙여 굴러온 뚜껑을 주웠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고, 속으로는 ‘쌤통이다’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