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이제는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수업 시간, 자오징윈의 시선은 자꾸만 교탁 위의 량옌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서 실낱 같은 단서라도 찾으려는 듯. 연기 속 그 사람의 눈빛은 평온하고 냉담했지만, 량옌의 눈매는 늘 낮게 깔려 있었다. 마치 사람과 눈을 마주칠 엄두조차 못 내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위축된 인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량옌이 이쪽을 힐끗 훑어봤다. 시선이 맞닿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눈꺼풀을 내리고 교과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제야 자오징윈은 정신을 차렸다. 선생님을 이렇게 빤히 바라보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그는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정위허가 교내 병원에 머물며 요양하게 되자, 그의 소동도 잦아들었고, 날들은 다시 평범해져 물 흐르듯 지나갔다. 어느덧 주말이었다.
귀가하던 길, 자오청쥔을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오징윈의 마음속이 은근히 뒤숭숭했다. 마차에서 내려 저택 본관으로 들어서자, 하녀가 다가와 책가방과 교복 상의를 받아들었고, 집사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본관은 여전히 조용했다. 예전의 수많은 날들처럼.
자오징윈이 물었다. “아버지 안 계세요?”
“예, 어른께서는 뤄저우(洛洲)1에서 열리는 상업 박람회에 초대받아 참석하셨습니다.”
“……”
“늦어도 다음 주말에는 돌아오실 겁니다.” 집사가 덧붙였다.
“차라리 평생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을 남긴 자오징윈은 본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오른쪽 복도를 따라 걸어기 적갈색 원목문 하나를 밀어 열었다. “엄마, 다녀왔어요.”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작은 탁자 위 우윳빛 도자기 꽃병에는 해바라기 한 다발이 꽂혀 있었고, 침대에는 깨끗하고 부드러운 꽃무늬 베개와 이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침대 머리맡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끼워진 흑백사진 속 아름다운 여인은 세네 살쯤 된 남자아이를 무릎 위에 안고 있었다. 여인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뺨을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대고, 카메라를 향해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자오징윈은 사진 앞에 반쯤 쪼그려 앉아 여인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며칠 사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정위허가 자업자득으로 발목을 삐어버린 이야기까지 마치고서야, 새로 온 역사 선생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다시, 연기 너머로 보였던 그 담담한 눈빛을 떠올렸다. 한참을 멈춰 있다가,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가끔은, 량 선생님이 다른 사람 같아요.”
엄마 곁에 있다가 저녁 시간이 되자, 자오징윈은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 식사를 했다. 혼자 밥을 먹는 일에는 이미 익숙했다. 오히려 자오청쥔이 집에 있을 때보다 마음이 더 편했다.
식사를 마친 뒤 그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왼쪽 복도로 꺾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먼저 욕실에서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책상 앞에 앉아 지난 주말에 읽던 책을 찾아 계속 읽었다.
눈이 피로해지자, 그는 서랍장에서 아무 음반이나 한 장 꺼내 턴테이블에 올렸다. 느긋한 바이올린 선율이 천천히 흘러나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침대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고, 어느새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새벽빛이 하얀 커튼 너머로 흐릿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음반은 이미 끝까지 돌아가 있었지만 턴테이블은 아직 윙윙거리고 있었고, 바늘은 한 바퀴, 또 한 바퀴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자오징윈은 몸을 일으켜 턴테이블을 껐다. 방 안은 순간 고요해졌다.
그는 그대로 등을 대고 침대에 넘어지듯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고서야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
오전에는 숙제를 하고, 오후에는 정원을 산책했다. 밤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책은 여전히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이야기는 결말이 코앞이라 마지막 몇 장만 남아 있었지만, 자오징윈은 문득 흥미를 잃어 더는 읽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시 턴테이블을 틀고, 흐르는 선율 속에서 창틀에 엎드려 멀리 내다보았다. 남빛 하늘이 조금씩 짙어지더니, 마침내 밤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이 하루가 겨우 지나갔다.
그의 친구들은 아마 더 풍성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약속은 주말 밤 당구였다. 자오징윈은 조금 일찍 도착했다. 그들이 드나드는 클럽에는 전용 룸이 있었고, 다른 친구들이 들어올 무렵, 자오징윈은 혼자 치던 당구 한 판을 거의 끝내고 있었다.
친구들은 몇 명이 함께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전용 룸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이렇게 일찍 왔냐, 징윈.” 쑹천하오가 웃었다. “지난주에 우리 바람맞힌 거 만회하려고?”
자오징윈이 고개를 돌리자 정위허가 맨 뒤에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걸음걸이에는 아주 희미하게 끌리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정위허, 벌써 퇴원했어?”
“더 있고 싶지도 않았어. 지루해서 죽는 줄.” 정위허는 요즘 일이 잘 안 풀려 얼굴까지 처져 있었다. “말도 마. 집에 가자마자 또 한바탕 혼났어.”
“됐고.” 옆의 남학생이 손에 든 레드와인을 흔들어 보였다. “봐, 우리 아빠 술창고에서 너 주려고 꺼내온 귀한 거야. 퇴원 축하한다!”
“너희 오늘 술 마실 거야?” 자오징윈은 큐대를 내려놓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 괜찮아.” 쑹하오첸이 말을 가로챘다. “여긴 학교도 아니고, 게다가 이 방에 열여덟도 안 된 사람이 있냐? 너도 아니잖아.”
정위허는 소파에 털썩 앉아 성가신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오는 길에 이미 얘기 다 끝났잖아. 괜히 초 치지 마.”
“……” 자오징윈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남학생은 재빠르게 코르크 마개를 뽑았다. ‘퍽’ 소리와 함께 와인이 열리고, 그는 잔에 따라 자오징윈에게 건넸다. “자, 맛봐. 내가 장담하는데, 진짜 좋은 술이야!”
짙은 붉은빛 술이 유리잔 안에서 흔들리며 화려한 빛깔을 비쳤다. 자오징윈은 한 번 내려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봤다.
“설마 거절?” 남학생이 웃으며 과장스럽게 말했다. “내가 특별히 너 주려고 따라준 건데, 이렇게 체면을 안 세워줘?”
자오징윈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잔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
“별말을.” 남학생은 손을 휘휘 저으며 돌아가 다른 사람들 잔에도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들은 제법 그럴듯하게 함께 잔을 들었다. 한 잔을 비우자마자 곧바로 채워졌다. 레드와인의 향이 방 안을 감돌았다. 당구도 다시 시작됐다.
차례가 아닌 사람들은 한쪽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쑹하오첸이 와인을 한 모금씩 홀짝이며 잡담처럼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징윈. 내 신청은 통과했어. 넌?”
“무슨 신청?” 자오징윈이 물었다.
“엘란티스 수도 사페르 대학 신청 말이야.” 쑹하오첸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 말로는 자오 삼촌이 네 것도 같은 학교로 넣어뒀다던데? 네 성적이 나보다 좋으니까, 너도 통과했을 듯?”
이 얘기가 나오자 자오징윈은 또 한 번 속이 뒤틀렸다. “모르겠어. 나 안 가고 싶어.”
“그럼 넌 어느 학교에 가고 싶은데?”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당구를 치던 남학생이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 “나랑 같이 오몽티 국립미술대학 넣을래? 거긴 예쁜 아가씨들이 많다더라.”
“넌 미술 때문에 가는 거야, 아가씨 때문에 가는 거야?”
“뭐가 달라. 결국은 다 아름다움을 좇는 거잖아?” 그들은 그렇게 웃고 떠들었다.
자오징윈은 눈길을 내린 채 말이 없었고, 안색도 좋지 않았다.
쑹하오첸이 달래듯 말했다. “사페르 대학 꽤 괜찮아. 거기 가면 우리 계속 같이 놀 수 있잖아. 너도 이제 자오 삼촌이랑 괜히 맞서지 마.”
“맞서려는 게 아니야.” 자오징윈이 낮게 말했다. “그냥 이렇게 정해진 대로 끌려가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난 정말 이해가 안 돼.” 정위허가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술을 좀 마셔서인지 말투도 더 거리낌이 없었다. “자오징윈, 넌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자오 삼촌이 내 아버지였으면 난 기뻐 죽었을 거야. 돈도 충분히 주고, 널 전혀 간섭하지도 않잖아.”
“진짜로, 징윈.” 쑹하오첸도 거들었다. “자오 삼촌은 이미 네게 엄청 잘해주고 계셔.”
자오징윈이 그를 한 번 바라봤다. “어디가 그렇게 보이는 건데?”
“생각해봐. 네 어머니 돌아가신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 자오 삼촌은 재혼도 안 했어. 밖에서 여자를 두고 지내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갑자기 사생아가 튀어나와 네 재산을 두고 싸울 일도 없지. 나중에 회사도 전부 네 거야. 그 정도면 충분히 좋은 거 아니야?”
자오징윈은 원래 몇 마디 더 반박하려 했지만, 그 말을 듣고는 완전히 마음이 꺾였다. 더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사라졌다.
정위허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깊이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고용한 탐정이 또 알아냈는데, 우리 아버지가 밖에서 작은 애인을 뒀는데, 배까지 불렀대. 조금만 더 늦게 알았으면 진짜 골치 아플 뻔했지.”
쑹하오첸이 웃었다. “봐, 눈앞에 사례가 있잖아?”
정위허는 다시 몸을 기대며, 곁눈질로 자오징윈을 흘끗 보았다. 마치 다 겪어본 사람처럼 말했다. “지금은 고마운 줄 모르지. 나중에 자오 삼촌이 진짜 사생아를 데려오면, 그때 후회하게 될 거야.”
자오징윈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한 판이 끝나, 진 사람이 큐대를 그에게 내밀었다. “자, 네 차례야.”
자오징윈은 받지 않았다. “너희 먼저 해. 난 좀 바람 쐬고 올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문을 밀고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정위허가 시선을 거두고 쑹하오첸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봐, 또 기분 상했지.”
계단을 내려 클럽 문을 나서자, 밤은 깊고 어두웠다. 거리에는 불빛이 가득 켜져 있었고, 한수에 인접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긴 길을 따라 산책하고 있었다.
자오징윈은 길을 건너 강가로 가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가로등 불빛이 물결 위에서 반짝이며 잔잔하게 흩어졌다. 바람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가자 술기운이 훅 올라왔다. 그는 물 위의 빛점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야가 조금씩 흐려지는 걸 느꼈다. 마치 저택의 창문마다 하나둘 불이 켜지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예전엔 이렇게 쓸쓸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어릴 적, 울리히 의사와 고로 제국에서 온 의료팀이 통째로 집에 머물던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길에서 마주친 의사와 간호사들이 서툰 화은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그 인사에 대답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본관 홀로 뛰어들어 계단을 올라, 그 문 앞까지.
그가 기억하는 한, 어머니는 늘 그 방 안에 있었다. 그녀는 폐결핵, 흔히 ‘폐랑’이라 불리는 병을 앓고 있었다. 전염성이 몹시 강해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설 수 없었고, 방에 들어가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매번 소독과 방호를 반복해야 했다.
사진 한 장을 제외하면, 그가 어머니를 떠올릴 때 가장 또렷한 건 붉은 갈색 방문에 배어 있던 나무 왁스 기름과 소독약이 뒤섞인 냄새였다.
어린 소년은 책가방 끈을 움켜쥔 채 숨을 헐떡이며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발소리가 들리길 기대했다. 그러면 안의 사람이 문 앞으로 다가와 몸을 낮추고, 똑같이 문을 두드려 답해주었다.
자오징윈이 웃으며 말했다. “엄마, 저 학교 다녀왔어요.”
문 너머에서 닝진의 웃음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징윈 왔구나. 오늘 학교에서 얌전히 있었니?”
그녀는 점심에 뭘 먹었는지, 오늘은 어떤 수업을 배웠는지 물었다. 자오징윈은 하나하나 대답했고, 이어 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들려주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자오징윈은 방문 앞 카펫에 앉아 문에 등을 기대고, 방 안에서 닝진이 읽어주는 동화책을 들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읽다가, 이따금 멈춰 기침을 했다. 자오징윈이 글자를 더 알게 되자, 자신이 읽겠다고 나섰다. 닝진은 문에 기대어 참을성 있게 듣고, 가끔 그의 발음을 바로잡아주었다.
밤이 깊어지면, 닝진은 다시 방문을 두드려 잘 시간이 되었다고 일러주었다. 자오징윈은 책을 정리하고 일어서며 말했다. “잘 자요, 엄마.”
“잘 자, 징윈.” 닝진은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은 뒤에야 일어나 침대로 돌아가 누워 쉬었다.
하지만 누구도 몰랐다. 자오징윈이 정말로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잠든 게 아니라는 것을. 그는 시곗바늘이 ‘딸깍딸깍’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 밤 열 시가 되면 울리히 의사가 마지막 검진을 마치고 더는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면, 그는 베개를 안고 조심스레 닝진의 방문 앞으로 되돌아왔다. 두툼한 카펫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잠들었다. 새벽의 발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면, 그는 가장 먼저 일어나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자오징윈은 꿈결에 방 안에서 들려오는 기침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는 눈을 뜬 채 어둠 속 천장을 바라보며, 말없이 그 소리를 들었다. 무엇이라도 함께 나눠 짊어질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다 방 안의 기침 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밤새 멈추지 않게 되자 울리히 의료팀은 더 이상 별채에 머물지 않고 본관 2층으로 아예 옮겨 들어왔다. 밤낮으로 사람들이 닝진의 방을 드나들었다. 자오징윈은 더는 몰래 문 앞 카펫에서 잠들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설령 문 앞까지 가는 것이 허락된다 해도, 닝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문가에 기대 그에게 한마디를 건넬 힘조차 없었다.
아홉 살이 되던 해 겨울, 닝진은 병통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오징윈은 집사에게 멀찍이 가로막힌 채, 문 앞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들것 위에는 두툼한 흰 천이 덮여 있어 어머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 속처럼 여전히 아름다웠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현실감이 없었다. 흰 천 아래에 누워 있는 이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닝진이 세상을 떠난 날, 자오청쥔은 외지에 있었다. 그는 그날 밤 기차를 타고 급히 돌아와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날의 하늘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고, 잘게 부서진 눈이 흩날렸다. 화장한 뒤의 유골함이 묘혈로 내려가고, 흙이 덮였다. 자오징윈은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바라보며, 여전히 멍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그는 마치 한순간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거대한 저택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듯했다. 울리히 의료팀은 장례가 끝나자마자 서대륙으로 돌아가 버렸고, 누구도 그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그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 어머니의 방문 앞에 이르렀다가, 문득 멈춰 섰다.
기억이 시작된 이래 줄곧 닫혀 있던 그 문이 마침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벽지마저 뜯겨 나가 벽은 맨살을 드러냈고, 창문은 활짝 열려 차가운 바람이 들이쳤다. 자오징윈의 마음도 어딘가가 뚝 비어버린 것 같았다.
감염 위험을 피하기 위해, 닝진이 생전에 쓰던 모든 물건은 불태웠다고 했다. 그는 그제야 어머니의 죽음을, 정말로, 처음으로 실감했다.
저택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고, 울음소리는 오직 그의 것뿐이었다. 넋이 나간 채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두리번거리다 집사를 붙잡고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집사는 쪼그려 앉아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주인어른께서는 처리하실 일이 조금 남으셨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돌아오실 겁니다.”
자오징윈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다그쳤다. “대체 어디에 계신 거예요?”
집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자오징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당장 데려가 주세요!”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닝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자꾸 되풀이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거의 집에 없다고 수없이 불평했지만, 닝진은 늘 부드럽게 말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 가족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고.
닝진은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말끝에는 유난히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그녀와 자오청쥔은 각각 우천의 명문가 출신이었고, 두 집안은 오래된 원한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내 서로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어느 여름밤, 두 젊은이는 각자 집안에서 정해둔 혼약을 버리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수도 선징으로 향하는 증기기관차에 올랐다.
그들은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인구 백만의 번화한 도시에서 작은 방을 빌려 자리를 잡았다. 대갓집 아가씨였던 닝진은 방직공장에서 일했고,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자오청쥔도 온갖 사람들이 뒤섞인 곳들을 전전하며 기회를 찾았다. 담력과 배짱을 믿고, 그는 우연히 군수품 밀매상 곁에서 일을 시작하며 장사에 발을 들였다.
모은 돈이 충분해져 전셋집을 정리하고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닝진은 공장 일을 그만두었다. 두 사람은 새 집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환호했고, 그해 임신해 자오징윈을 낳았다.
자오징윈이 네 살이 되던 해, 자오청쥔은 자기 회사를 세웠다. 그들은 지금의 저택으로 이사했고, 같은 해 닝진은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오랜 세월 방 안에 갇혀 지냈고, 자오징윈은 날마다 자라났다. 반면 자오청쥔이 집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마차가 멈췄다. 자오징윈은 뛰어내려 화려한 호텔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집사는 그를 데리고 들어가 계단을 올랐고, 주인어른께서 반드시 만나야 하는 중요한 고객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
자오징윈은 말이 없었다. 객실 앞에 도착하자, 집사는 불안한 듯 돌아보며 문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자신이 들어가 주인어른을 모셔 나와 따로 이야기하게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집사가 돌아서 문을 여는 바로 그 순간, 자오징윈은 문을 밀치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의 분위기는 한창 달아올라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둘러앉은 남자들은 한바탕 크게 웃어젖혔고, 자오청쥔도 웃고 있었다. 그들 곁에는 술을 따르며 웃음을 보태는 여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진한 화장에 옷차림도 노출이 심했다.
모두가 한꺼번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고, 자오청쥔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자오징윈은 검은 정장을 입고 가슴 주머니에 흰 꽃을 꽂은 채였다. 오늘은 어머니의 장례식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밤이 되자 이렇게 앉아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슬픔만큼, 분노도 거세게 치밀어 올랐다. 자오징윈은 앞으로 나가 식탁보를 움켜쥐고 온 힘을 다해 탁자를 뒤엎었다. 술과 음식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그릇과 잔이 요란하게 바닥에 떨어져 부서졌다.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고, 남자들은 불쾌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자오청쥔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연한 기색을 잃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웃으며 사과했다. 아이가 철이 없다고 하며. 그리고 두 손으로 자오징윈의 어깨를 붙잡고, 말릴 틈도 주지 않은 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그는 자오징윈을 옆의 비어 있는 방으로 밀어 넣었다.
자오청쥔은 당황해 따라오던 집사까지 밖에 세워 두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자오징윈을 놓아주며 말했다. “집에 얌전히 있지 않고, 왜 여기까지 온 거냐?”
자오징윈은 얼굴을 치켜들고 그를 미워하듯 노려보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오청쥔은 소파에 앉았다.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고, 몹시 피곤해 보였다. “중요한 고객이다. 선징에 이틀밖에 머물지 않으니, 내가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 너는 우선 집으로 돌아가라. 무슨 일이든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아직도 술 마시러 돌아가려고요?” 자오징윈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사업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은 엄마 장례식이에요!”
“안다.” 자오청쥔은 담담하게 말했다. “징윈, 너만 엄마를 잃은 게 아니다. 오늘은 내 아내의 장례식이기도 하다.”
“당신이 무슨 남편이에요? 한 번도 집에 와서 엄마를 보지도 않았잖아요! 혼자 방에 두고! 하필 오늘도, 오늘 하루도 엄마 곁에 있어 줄 수는 없었어요? 또 술 마시고, 그딴 사업 이야기나 하고!”
자오청쥔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딴 사업으로 돈을 벌어야 하니까.”
“돈, 또 돈! 돈 말고는 아는 게 뭐예요?” 자오징윈은 더는 참지 못했다. “그럼 결혼하지 말았어야죠. 엄마가 집에서 당신을 기다리지 않게 했어야죠. 당신이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엄마는 공장도 그만두지 않았고, 병들지도 않았을 거예요! 차라리 우천에서 약혼했던 그 남자랑 결혼하는 편이, 당신한테 시집오는 것보다 나았을 거라고요!”
그 말에 자오청쥔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아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나? 내가 나를 위해 버는 줄 아느냐? 울리히 의사와 의료팀을 고로 제국에서 통째로 데려오는 데, 하루에 얼마가 드는지 아느냐? 네 어머니의 주사제가 배로 실려 왔다는 걸 아느냐? 그녀가 먹던 약 한 알이 금보다 비쌌다는 건?”
“결국, 당신 말은 또 돈이잖아요. 정말 사랑했어요? 함께 있어 준 적은 있어요?”
“내 사랑이 그녀를 살릴 수 있었나? 네 곁에 있어 준 게 그녀를 살렸나?” 자오청쥔은 고개를 저었다. “자오징윈. 그 많은 돈이 아니었다면, 너는 다섯 살 때 이미 엄마를 잃었을 거다.”
자오징윈은 온몸이 움찔했다. 분노에 떨고 있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장면이 계속, 계속 떠올랐다. 자오청쥔은 여느 때처럼 웃고 있었고, 술을 따르던 여자는 옷깃을 깊게 늘어뜨린 채 가슴을 거의 그에게 붙이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머니의 장례식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웃을 수가 있어요?”
“웃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냐?” 자오청쥔은 그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알아차린 듯했다. “사람들은 놀러 나온 거다. 네가 상주처럼 울상을 짓는 걸 보러 온 게 아니다. 네가 청고한 척하는 걸 보러 온 것도 아니다. 이해하겠느냐?”
한참이 지나서야, 자오징윈은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역겨워요.”
자오청쥔은 눈을 감았다. 더는 아이와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른다. 크면 알게 될 거다.”
“몰라요.” 자오징윈은 이를 악물었다. “커도 모를 거예요. 죽어도 당신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거예요!”
자오청쥔은 눈을 뜨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다. 너도 결국 그렇게 될 거다.”
그 말은 마치 저주처럼 들렸다.
그는 월요일 아침을 떠올렸다. 애초에 강단 위로 올라가 “남자친구 있어요?”라고 묻지 말았어야 했다.
설령 정위허와 그들이 일부러 놀리려던 게 아니었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정말 여자 선생님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질문은 결국 무례한 짓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계속 어울려 놀기 위해, 자신이 그렇게 ‘고결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그는 그렇게 해버렸다.
자오징윈은 문득 뒤늦게 밀려오는 공포를 느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서서히, 자오청쥔이 말한 것처럼 변해 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는 정위허와 그 무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자오청쥔의 체면 때문에 관계를 이어갈 뿐이었다. 그렇다고 혼자인 건 더 싫었다.
자오징윈은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보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을 의식한 노골적이거나 은근한 아첨이 늘 따라붙었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정위허와 그 무리가 더 평등하고, 더 가볍고,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건, 결국 그의 뒤에 서 있는 자오청쥔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었다. 정작 그는 중요하지 않았다. 혹은, 분위기를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자오청쥔은 물었다. 내가 대체 네가 뭘 잘못했냐?
정위허도 물었다. 너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이제는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아득한 기억 속에서, 그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한 가닥의 실처럼 떠오른 것은 닝진의 목소리였고, 방문 너머에서 들려주던 동화의 의미였다. “가장 중요한 건, 정직하고 선한 사람이 되는 거란다.”
강물은 졸졸 흐르고 있었다. 바람을 오래 맞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오징윈은 난간 위에 얹은 팔에 이마를 기댔다.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목소리가 멀게 번졌다.
“학생?”
“학생?”
자오징윈은 문득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 목소리는 유난히 또렷했고, 바로 곁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아래, 량옌 선생님이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우연이네. 정말 너 맞구나?”
- 가상의 도시. 현실 중국 행정구역에는 해당 이름의 시·현·구가 존재하지 않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