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英 2024. 3. 31. 04:35
귀운산장의 강?



결국 척조석은 설락을 따라 신예 시합에 나타났다. 거절할 수 없었고, 아무리 그래도 주인집의 체면을 깎기란 어려웠다. 단지 설락이 상습적으로 일찍 도착하자 가복들을 그들을 극진히 대접해 높은 단상에 앉게 하였다. 척조석이 눈을 내리깔고 보니 주위와 옆의 몇몇 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연무장의 무대 옆으로 몇 무리의 사람들이 모래밭에 흩어져 있는 개미처럼 드문드문 모여 있을 뿐이었다.

아침 햇살이 어슴푸레 내리자, 척조석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졸린 눈을 겨우 뜨곤 설락과 연을 끊을지 생각했다.

설락은 미안해하며 웃었다. “다음부터는 일찍 부르지 않겠네. 시간이 아직 이르니, 우선 선잠을 좀 자보는 것이 어떤가?”

“됐어.” 척조석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손을 내저으며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그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 좋은 자리들은 청산파와 광금종에게 남긴 것이 틀림없는데, 이상하군. 주인석 옆의 빈자리는 누구에게 준 것이지? 귀운산장에서 사람을 보내기라도 한 건가?”

“정거한(程居闲), 정 대협의 자리일 테지.” 설락이 말했다. “위 장주는 그를 청해 공명정대하게 만들었어. 시합이 끝난 후 그 검을 임시로 정 대협이 잠시 보관하게 하고, 명검대회에서 결판이 나면 승자에게 전달하게 하려는 거야.”

척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위민은 구차한 일개 상인에 지나지 않았다. 고작 명검대회에 이렇게 많은 강호인들이 체면을 차리지 않고 달려들 수 있겠는가. 그 감춘 보검 말고도 정거한의 명성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이분 정 대협은 20여 년간 강호를 떠돌아다녔지만, 무공으로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강호인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것은 그가 신의를 중시하여 한 번 승낙한 말은 천금으로 여긴다는 점이었다. 가장 칭송받는 것은 그 당시 그의 절친한 친우가 간사한 자에게 상흔을 입자, 정거한은 임종의 부탁을 받아 멀리 서역으로 떠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신분을 숨기고 잠복하여 추척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서역 36개국의 모래와 흙먼지가 어찌나 광활한지, 그는 꼬박 15년이 걸려서야 마침내 간사한 자를 제 손으로 베어 죽이고 친우의 처자식을 중원으로 데려와 머물게 했다.

남에게 한 번 승낙하는 것은 쉬우나, 기꺼이 15년의 세월을 바쳐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 때문에 비록 어떤 사람이 이번 명검대회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정거한이 나서는 것을 보고는 모두 걱정을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연이어 도착했다. 다른 문파는 언급할 필요가 없으나, 3대 문파 중 귀운산장이 빠진 것을 제외하면 청산파에서는 심 장문은 세 아들을 모두 참석시켰고, 광금종의 임 장문도 딸을 보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명검대회에 대한 존중을 알 수 있었다.

설락의 말대로 정거한은 과연 위민과 함께 나타나 주인석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그는 중년임에도 용모가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온화한 얼굴로 주변 사람들과 낮은 소리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때 날이 훤히 밝아왔다. 위민의 짧은 축사가 끝나자 연무대 옆에 있던 가복들이 힘껏 징을 두드렸다. 징이 울리는 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니 시합이 시작되었다.

두 청년이 먼저 연무대에 올랐는데, 그들은 아직 풋풋한 탓에 눈빛을 억누르지 못해 높은 단상 위를 힐끔거렸다. 이어 서로 이름을 알리더니 바로 맞붙기 시작했다.

강리는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무대 아래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연무대 위에서 칼날이 맞닿는 소리가 나자 마치 기름 한 방울이 군중 속으로 떨어진 듯 뜨거운 열기가 일었다. 그러나 강리는 무대에 올라 겨루어 보려는 젊은이들이 어제 왔을 때보다 절반 가까이 줄은 것을 알아챘다. 위가도 무대 옆에 서서 격추전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정신을 딴 데 팔았다.

강리는 위민이 입장할 때 특별히 이쪽을 힐끗 훑어보았음을 떠올렸다. 파란은 마치 일찍이 예상했던 것처럼 왔다. 그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어제 연무장의 익살극이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를 품은 격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가 나서 떠난 사람들은 자신이 존엄을 되찾은 줄 알았지만, 실상은 계략에 걸려든 셈이었다.

적수를 한 명 줄이면, 그만큼 승산도 늘어난다.

그는 눈을 돌리자 무대 위의 두 사람도 승패가 났다. 승리한 청년은 장총을 움켜쥔 채, 점점 더 흥분하여 새로운 상대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만장이 담론하는 소리 속에서 강리의 귓전은 유난히 맑고 깨끗했다. 그가 옆에 있는 조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앞을 바라보았으나, 눈빛은 연무대 위의 반짝이는 사람의 그림자를 지나며 저 멀리 높은 단상에 떨어졌다. 마치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또 강리에게 장 내의 관중들을 가리키며 어느 문파에서 미인을 보냈는지 어느 호협이 정이 들었는지를 가르쳐 주었는데 손바닥을 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러나 위민이 연무장에 들어서자 조월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뒤로 벌렁 나자빠지자 총을 든 청년이 다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무대 아래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또 어느 분이 올라오시겠습니까?”

강리는 갑자기 옆이 텅 비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월은 이미 무대 위로 뛰어올라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맞은편에 서 있는 소녀가 수홍색 옷을 입은 데다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어, 총을 든 청년은 다소 의아해하곤 웃으며 말했다. “낭자의 이름을 감히 물어도 될는지요?”

“조월!”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자, 강리는 왠지 대답이라기보단 누군가의 주의를 끌려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 말이 나오자 무대 아래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의논과 대화 소리가 조수처럼 높아져, 방금 전에 무예를 겨루었던 것보다 더 격렬해졌다. 총을 든 청년은 안색이 괴상하여 무의식적으로 높은 무대를 바라보았다. 높은 단상 위에 있던 정거한은 벌떡 일어나 무대 위의 수홍색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가 경공을 써서 몸을 훌쩍 날려 직접 무대 위로 스쳐 올라가자, 군중들이 목구멍 속에 짓눌린 비명을 질렀다.

일시에 모든 시선이 정거한에게 모였다——조월을 제외하고. 그녀는 여전히 정거한을 등지고 있어서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너……너 뒤돌아 봐……” 정거한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월은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고개를 들곤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거한은 옷자락 끝도 제대로 보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다급하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끝에 가서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강리는 왜 다른 사람들이 조월의 이름에 놀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정거한과 마주 보고 서자 모든 것이 더욱 명백해졌다. 그녀는 정거한과 조금 닮았다. 특히 그 도화안은 마치 절세 화사가 같은 붓으로 그린 듯했다.

다만 같은 눈이나, 한 쌍은 평온하여 흔들림이 없고, 한 쌍은 애석함을 꾹 참고 있었다.

정거한은 참지 못하고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옷소매를 만지려 했다. 그녀가 거울 속의 꽃, 물속의 달과 같은 환영일까 두려웠다. 조월이 갑자기 뒤로 물러나 피하자 정거한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졌다. 그는 멋쩍게 손을 움츠리고 나서야 마침내 목소리를 되찾았다. “…… 네 어머니 이름이 무엇이냐?”

“친정의 성이 맹(孟)이고, 이름은 운(芸)입니다.”

“그럼 너, 나를 아느냐?” 정거한은 조심스럽게 물었고 눈빛이 번쩍였다. 연무장 전체가 고요하여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 대협이 거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소녀에게 말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내겐 아버지가 없습니다!” 조월이 그의 말을 잘랐다.

정거한의 눈에 비친 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듯 한동안 다른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주위의 시선 하나하나가 거의 갈고리로 변해 이 몇 마디 말을 헤집고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을 캐내려 했다.

정거한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뒤늦게 자신의 당돌한 결례를 깨닫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총을 든 청년에게 황급히 공수했다. 청년은 총애를 받고 놀라서 얼른 답례했다. 그는 이어서 여러 사람에게 사과했다. “내 마음이 조급하여 경솔하게 시합을 그르쳤습니다. 여러분 양해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무대 아래로 내려갔으나, 무대 끝에 다다르자 참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신신당부하였다. “그럼 너 조금 더 주의하고, 무리하지 말거라……”

조월이 그를 노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한숨을 푹 쉬고는 무대에서 내려가 한 걸음 한 걸음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의 눈빛은 여전히 멀리 정거한의 그림자에 끌려갔다. 이에 조월은 이미 몸을 돌려 검을 들고 맑은 소리로 일갈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오십시오!”

“조월 낭자의 기백이 대단하니, 소생도 사양하지 않으렵니다.” 청년은 손바닥으로 총자루를 미끄러뜨려 꽉 움켜쥐더니, 그녀가 덮쳐오는 족족, 총 끝 부분으로 허공을 잘라내듯 그어 급소를 공격했다. 그녀가 처녀라고 해서 조금도 마음을 무르게 먹지 않았다.

조월이 무심코 검을 들어 올려 막자, 금속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굉음을 냈다.

청년은 임기응변으로 손목을 뒤집었다. 총구가 단번에 검날을 휙 지나쳐 앞으로 뻗어나가자, 조월은 급히 허리를 굽혀 스치듯 피했다. 그러나 똑바로 일어서는 순간 검을 휘두르자 장총의 방향이 틀어지더니, 이 기회를 틈타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여 검을 꺾었다.

장총은 대개대합(大开大合)의 길을 걸어 기세가 등등했다. 청년의 손아귀에서 춤추듯 돌며 무대를 거의 제패하며, 상대방에게 조금도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아울러 조월은 본래 몸집이 작고 발놀림이 대단히 민첩했다. 마치 붉은 물고기 한 마리가 총의 그림자로 엮인 조류 사이를 누비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현격한 차이는 점차 드러났다. 조월은 비록 조금도 다치지 않았지만, 결국 장총의 필사적인 기세에 짓눌려 수세에 몰렸다.

정거한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주시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꽉 잡았다.

바로 이때, 조월의 눈빛이 반짝이며 약간의 틈을 잡았다. 그녀가 매우 빠르게 장총을 불빛이 튀게 내려치자, ‘퍽’ 하는 맑은 소리가 울리며 장검이 뜻밖에도 청년의 옆구리 쪽을 쳐냈지만, 예리한 날은 홑옷만을 엷게 베어내는데 그쳤다.

조월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다. 청년도 어리둥절해 하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 “낭자께서 사정을 봐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소생이 복숭아를 선물 받고 자두로 답례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십시오.”[각주:1]

입으로는 떠들었지만, 그의 손아귀에 들린 장총은 멈추지 않고 춤추듯 돌며 휙휙 바람 소리를 내었다. 몰아붙여진 조월은 연이어 후퇴하여 다시 장검이 닿는 범위를 벗어났다. 청년은 승승장구하며 두 손으로 동시에 총을 들고 전력을 다해 휩쓸기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불어온 가을바람이 낙엽을 쓸어버리듯 기세가 맹렬했다.

조월이 급히 몸을 뒤로 젖히자 매서운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이와 동시에 몸의 균형이 무너져 뒤로 휘청였다. 그녀는 불현듯 눈을 크게 뜨고서야 방금 자신이 무대의 가장자리로 물러났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렇게 넘어지면 연무장의 모래밭이 기다리고 있으니, 설령 넘어지지 않아도 충분히 낭패스럽고 난감할 것이다.

그녀는 화가 나서 눈을 감았다.

정거한은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켰지만, 조월이 갑자기 넘어지기는 커녕 이내 안정적으로 섰다. 올라서서 보니 한 소년이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강리는 조월의 등에 얹었던 손을 거두었다.

“고마워, 고마워.”[각주:2] 조월은 놀란 나머지, 강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정말 창피해서 죽었을지도 몰라.”

“괜찮아?” 강리가 물었다.

조월이 고개를 젓는 것을 보자, 그는 총을 든 청년에게로 몸을 돌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검을 검집에서 뽑아 들었다.

연무대 위의 두 사람이 다시 맞붙었다. 척조석은 회랑 아래에서 마음을 사로잡는 눈빛을 보낸 소년임을 알아차리자 조금 흥취가 돋아 고개를 살짝 기울여 설락에게 물었다. “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말했지?”

“만약 내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강리라고 말했을 거야.”

“어느 강?” 척조석이 말했다. “귀운산장의 강?”

“귀운산장의 사람 같지는 않아.” 설락은 연무대의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저 청년은 이미 세 경기에서 연달아 이겼지. 내가 보기에 그는 사격술이 매우 뛰어나니 앞날이 창창해 보여. 이번 경기는 모르겠지만……”

쿵쾅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그의 말소리가 뚝 그쳤다. 심지어는 이렇게 큰 공연장까지도 괴이쩍게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태양빛이 강렬해졌다. 연무장 저편의 오동나무는 짙푸렀는데, 바람이 불자 바스락 소리를 냈다.

연무대 위의 그 청년은 믿을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의 손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기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몇 장 떨어진 곳에 장총 한 자루가 비스듬히 땅에 박혀 있었다. 모래 먼지가 세차게 일어났고, 총대의 떨림은 그치지 않았다.

다섯 수 안에, 승패는 이미 정해졌다.

청년은 소리 내어 통쾌하게 웃으며 강리를 향해 공수했다. “속이 다 후련하군요, 진심으로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는 말이 끝나자 무대에서 뛰어내려 가 장총을 한 손에 집어 들고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떠나갔다.

조월은 얼이 빠져 검을 드리우고 선 강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소리에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당혹감이 숨겨져 있었다. “네가 이렇게 대단할 줄이야……”

  1. 投桃报李 [성어] 투도보리. 복숭아를 선물 받고 자두로 답례하다. 선물을 주고 받으며 친밀하게 지내다. [본문으로]
  2. 원문; 谢啦谢啦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 쓸 수 있는 말. 谢谢를 줄여서 표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