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혹시 ‘밀림’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다음 날 아침, 자오징윈이 식당에 들어서자 세 명의 직원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팡위가 손짓으로 그를 불렀고, 자오징윈이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오늘은 안색이 조금 안 좋으신데요.”
“괜찮아, 어젯밤에 잠을 설쳤어.” 자오징윈이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어제는 그렇게 활기차시더니. 도련님, 혹시 배 안 침대가 불편하신가 봐요?” 린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오징윈은 고개를 저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양샤오산이 거의 식사를 마친 것을 본 그는 궁금한 듯 물었다. “샤오산,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일찍 잠들었으니 일찍 일어나는 게 당연하죠.” 팡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보스, 이렇게 일찍 자본 건 처음이에요.” 양샤오산이 감탄하며 말했다. “어젯밤 팡 형이 준 사전을 펼치자마자 잠들었는데, 수면제보다 효과가 좋더라고요!”
“……” 자오징윈이 린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앞으로 매일 아침 네가 그의 숙제를 검사해 줘.”
“네, 알겠습니다.” 린나가 명쾌하게 답했다. 이어 활짝 웃는 얼굴로 양샤오산을 향해 말했다. “샤오산, 어젯밤에 단어 몇 개 외웠니?”
양샤오산은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린나의 팔을 붙잡고, 연거푸 “린 누나, 제발 살려만 주세요!”라고 외쳤다.
두 사람이 잠시 소란을 피우는 사이, 팡위는 자오징윈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부녀의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아버지는 류즈제(柳志杰)로, 유명한 비단 상인이자 엘란티스 왕국 화은 상회의 부회장 중 한 명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류이이(柳依依)로, 외동딸입니다.”
“상회 부회장이라……” 자오징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회는 엘란티스 각계 인물들과 두루 접촉해 인맥과 자원이 풍부하지. 확실히 좋은 진입점이지만, 우리로서는 범위가 너무 넓어 군의 목적까지는 파악하기 어렵군.”
“상대의 다음 움직임을 지켜봐야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팡위가 말했다.
자오징윈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들어올렸을 때, 마침 스추와 훠웨이닝이 차례로 식당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분, 좋은 아침입니다.” 팡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훠 박사님, 오늘 얼굴빛이 좋지 않은데, 어젯밤 잠을 잘 못 주무셨습니까?”
“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훠웨이닝이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훠웨이닝은 정신력이 강한 인물이었지만, 어젯밤 스추가 드러낸 잔혹한 진실은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방으로 돌아간 뒤에도 춭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상하네요. 왜 일찍 방에 들어간 사람들만 유독 잠을 못 잤다고 할까요?” 린나가 스추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위 도련님은요? 어젯밤 잘 주무셨나요?”
“괜찮았습니다.” 스추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창룡호에서 제공되는 조식은 서양식이 주를 이뤘다. 훈제 연어와 베이컨, 구운 햄에 채소를 곁들여 정갈하게 차린 한 접시, 작은 식사용 빵과 옥수수빵 옆에는 색감 고운 두 종류의 잼이 놓여 있었다. 바다 위를 항해 중인데도 신선한 과일을 정성껏 썰어 담은 접시까지 함께 차려졌다.
스추는 작은 빵 한 조각만 집어 들었다. 잼도 바르지 않은 채 두어 입 베어 문 뒤 내려놓고는, 그것으로 식사를 마친 듯했다.
한쪽에 앉은 훠웨이닝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미 설득을 포기한 듯했다.
자오징윈은 시선을 거두고, 접시가 거의 비어 있는 양샤오산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샤오산, 아직 더 먹을 수 있겠어?”
양샤오산이 배를 살짝 만져보며 대답했다. “거의 다 찼어요. 왜요?”
“조리실을 좀 빌려서 해물죽을 끓였거든.” 자오징윈이 뒤돌아 웨이터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마침 잠도 안 오고, 가만히 있자니 좀 그래서.”
웨이터는 이미 준비를 마친 듯 쟁반을 들고 와, 사람들 앞에 금빛 테두리가 둘러진 작은 도자기 그릇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이 담겨 있었다. 찰지고 투명한 쌀알 사이사이에 연한 새우살과 게살이 어우러져, 고소한 향이 식욕을 자극했다.
“와, 보스, 진짜 요리할 줄 아시네요?” 양샤오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린나가 가장 먼저 한 숟가락 떠 먹고는 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직접 만드신 거예요? 조리실에 시켜서 우리를 속이는 건 아니죠?”
“너희를 속일 필요가 있을까?” 자오징윈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이 새우는 조리실에서 준비한 건가요? 아니면 직접 손질하신 거예요?” 팡위가 숟가락에 든 새우를 살펴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묻는 거야?”
팡위는 곧 상황을 이해한 듯 혀를 차며 감탄했고, 맞은 편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두 분 운이 참 좋으시네요. 저는 사장님을 2년 넘게 알았지만, 요리 솜씨를 맛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자오 사장님, 당신의 죽 한 그릇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서양식 음식조차 빛이 바랠 정도였습니다.” 훠웨이닝이 진심을 담아 칭찬했다.
“별말씀을요, 저도 이런 음식은 익숙하지 않아서 직접 만든 것뿐입니다.”
자오징윈은 모두의 칭찬에 어색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잠시 후 스추를 바라보니,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쥔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음이 무거워진 자오징윈은 망설임 끝에 조심스레 물었다. “위 도련님, 이 죽도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아닙니다.” 스추가 살짝 웃었다. “어찌 자오 선생의 체면을 깎겠습니까.”
그는 숟가락으로 죽을 몇 번 저었다. 한 숟갈 정도라면, 혹여 탈이 나더라도 견딜 수 있겠다 싶어 자연스럽게 한 입 떠먹었다.
익숙한 맛이 순식간에 미각을 깨우고, 오래 전 기억과 맞닿은 듯한 감각에 스추는 잠시 멍해졌다.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마치 뜨겁지 않은 태양 하나를 삼킨 것 같았다. 그것은 얼어붙고 무감각했던 위 속에 닿아 잔잔한 온기를 퍼뜨렸다.
스추는 다시 한 숟가락 떠 먹어 보았다. 불편함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위장이 점차 부드럽게 풀어지는 듯했다. 아마 너무 익숙한 맛이라서, 그 익숙함이 오래된 기억 속 깊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기자 자오징윈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추는 반사적으로 눈을 돌리려 했지만 참아냈고, 그 모습에 약간의 어색함이 배어 있었다.
“오랜만에 요리를 하다 보니 손이 좀 굳었네요. 이번 간은 괜찮았나요?”
“괜찮습니다.” 스추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다행입니다.” 자오징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추는 자오징윈이 조식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해물죽을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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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침내 기다리던 인물이 식당에 들어섰다.
류즈제는 입구에 멈춰 서서 식당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곧장 이쪽으로 걸어왔다. 스추는 그를 가장 먼저 알아봤지만, 못 본 척하며 제 앞의 죽을 말끔히 비웠다. 입가를 닦는 손길에도 느긋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상대가 먼저 인사를 건넬 때까지 태연하게 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신사 여러분, 그리고 이 숙녀분도요.”
스추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도 잠깐 뵌 적 있지요?”
“예. 어젯밤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정중히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류즈제가 공손히 말했다. “성은 류(柳), 버드나무 류 자입니다. 이름은 뜻 지(志), 빼어날 걸(杰) 자를 쓰지요. 엘란티스에서 오래도록 비단 관련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어젯밤에 다소 철없게 군 아가씨는 제 딸, 류이이입니다.” 1
“송양서국, 위예입니다.” 스추가 자신을 소개하고는 손짓으로 맞은 편을 가리켰다. “이쪽은 흑석공사의 자오징윈 선생님이십니다.”
“흑석공사라……” 류즈제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자오청쥔 선생님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여쭈어도 될까요?”
“아버지 되십니다.” 자오징윈이 정중히 답했다.
“어쩐지 인상이 낯익다 했습니다.” 류즈제의 미소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오 형님과는 오랜 인연이 있습니다. 아드님 이야기도 자주 들었지요. 이런 자리에서 우연히 뵙게 되다니, 참 뜻깊은 인연입니다. 서대륙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길인가요?”
“저희는 고용주의 지시에 따라 동행 경호만 맡고 있습니다.” 자오징윈은 옆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분들은 제 직원들이고, 저쪽에 계신 분은 위 도련님의 개인 주치의입니다.”
류즈제는 차례로 이들의 이름을 묻고 인사를 나눈 뒤 말했다. “여러분, 식사 후 일정이 따로 없으시다면, 제가 소장한 숙성 위스키를 함께 시음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그는 스추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위 선생님의 손재주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어젯밤, 이이는 머리를 풀기 아깝다며 좀처럼 잠자리에 들려 하지 않았지요. 내일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눈을 감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선생님을 뵈러 가자며 졸라대기에, 부득이하게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예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 마음을 너그러이 헤아려 주신다면, 아비 된 사람으로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스추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항해 중엔 그리 바쁜 일도 없으니, 이 어린 친구와 친구가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류즈제는 이 말을 듣고 활짝 웃었고, 다른 사람들 역시 동의의 뜻을 보이자 손짓으로 앞서 길을 열며 자신의 객실로 안내했다.
부녀가 머무는 곳은 창룡호에 단 두 개뿐인 궁전형 스위트룸이었다. 응접실 하나, 침실 두 개, 욕실 하나에,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용 베란다까지 딸려 있어, 일행 여섯 명이 함께 있어도 전혀 비좁지 않았다.
류이이는 긴 까만 머리를 풀어내린 채, 흰색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소파에 엎드려 인형의 머리를 빗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잽싸게 고개를 돌린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아빠, 진짜로 그 아저씨 데려오셨네요!”
“그럼, 아빠는 널 속인 적이 없잖니.” 류즈제는 두 팔을 벌리며 몸을 숙였고, 달려온 딸은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딸을 놓아준 그는 스추 쪽으로 돌아섰다. 류이이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아저씨! 저요, 엄청 예쁘고 멋진 머리를 원해요!”
“괜찮아. 앞으로 매일 아침 나를 찾아와도 돼.” 스추가 다정하게 말했다.
류이이는 작게 환호하며 달려가 침실에서 보석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장신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정말 신경 써 주시네요.” 류즈제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는 딱 오늘 하루만 허락했는데, 매일 이렇게 폐를 끼쳐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처음 떠나는 해외 여행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친구도 사귀고 할 일도 생기니 잡다한 생각이 덜할 것 같아요.” 스추가 말하며 류이이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류즈제는 다른 이들에게도 자리를 권하며 집사에게 술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금빛 술이 유리잔 안에서 부드럽게 일렁이며 은근한 향기를 풍겼다. 모두가 잔을 들어 한 모금씩 맛본 뒤에야, 류즈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까 징윈 씨의 말씀을 들으니, 위 선생님께서 청해 오신 분들이라 하시더군요. 서대륙에는 무슨 용무로 향하시는 길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습니다. 부친께서 엘란티스에서 성공적인 이식 사례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를 보내신 겁니다.”
“그래서 곁에 의사까지 동행하신 거였군요.” 류즈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심장이식에 대해 들은 적 있습니다. 기술은 이미 꽤 안정적이라고 하더군요. 다만 문제는, 적합한 심장을 기다리는 일이지요.”
“맞습니다. 삼 년이 걸리든, 오 년이 걸리든, 기다리는 수밖에요.”
“수술은 어느 병원에서 받으실 예정입니까?”
“세인트 크리스티(圣克里斯蒂) 병원입니다. 다만 이식 대기자는 입원하지 않고 기다리는 방식이라서요. 병원이 있는 국왕구가 수도 사페르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라는데, 우리 일행이 무사히 머물 곳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아직 숙소는 정하지 못하셨나요, 위 선생님?”
“엘란티스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어, 도착해서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추가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류 선생님, 혹시 추천할 만한 여관이 있으신가요?”
류즈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상회에서 회원과 왕래하는 상인들을 위해 전용 별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빈 방도 자주 있고, 국왕구 중심에 위치해 교통도 편리하죠. 만약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그곳에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스추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른 이들의 얼굴을 살피며 의견을 구하는 듯했다.
훠웨이닝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보였다.
자오징윈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회 전용 별관이라면, 저희가 묵을 수 있는 곳은 아닐 텐데요.”
“아.” 류즈제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웃음을 지었다. “말씀을 못 드렸네요. 저는 현재 화은 상회 부회장을 맡고 있어 숙소 마련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폐를 끼치는 셈 아닌가요?” 스추가 말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 머무는 기간이 정해지지 않아 상회로선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의 호의만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그게 오히려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위 선생님은 아직 잘 모르시겠지만, 엘란티스의 수도 사페르는 현재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밀집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힙니다. 여관을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번화한 지역에 교통까지 편리한 곳이라면 빈방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요. 게다가 일행이 여섯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집을 구해 장기 체류를 한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괜찮은 집은 더더욱 구하기 어렵고, 설령 찾는다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여섯 분이 함께 머문다면 그만한 임대료도 적지 않은 액수일 테고요.”
스추는 순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게다가, 징윈 씨의 체면을 봐서라도 대충 묵게 둘순 없지요. 자칫 당신 아버님이 아시면, 접대를 소홀히 했다고 책망하실 겁니다.” 류즈제가 웃으며 자오징윈을 향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오징윈은 호응하듯 가볍게 웃었다. “류 선생님께서 세심히 배려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저도 이번이 서대륙 첫 방문이라, 여러모로 신세를 질 것 같습니다.”
“별말씀을요.” 류즈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스추에게 권했다. “위 선생님, 사실 상회 소속 별관은 비어 있어도 낭비입니다. 마음에 걸리신다면 정해진 임대료만 지불하셔도 괜찮아요. 저 역시 평소 상회에 머물고 있으니,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생기면 바로 챙겨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류 선생님.” 마침내 스추가 받아들였다.
“천만에요.” 류즈제가 웃으며 말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친구 사이잖습니까.”
말을 주고받는 사이, 스추는 어느새 류이이의 머리를 곱게 땋아 올려, 단정히 마무리하고 있었다. 실핀 대신 꽂은 크리스털 나비 장식이 머리카락 사이에서 은은한 빛을 내며 반짝였다.
아이는 환한 얼굴로 일어나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화장대 거울 앞에 섰다.
린나는 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집어 들고는 객실 안을 둘러보더니, 틈을 타 말을 꺼냈다. “보아하니 이번엔 가정부 없이 오신 모양이네요, 류 선생님. 어린 딸을 돌보는 일이 만만치 않으시겠어요.”
“정말 쉽지 않은 경험이에요.” 류즈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엘란티스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해왔는데, 이번에 귀국하면서 아이 엄마와 이혼했거든요. 이후 이이도 데리고 사페르에 정착하려 했는데, 이이를 돌보던 가정부가 고향을 떠나길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직접 챙기게 되었죠.”
“그래도 이이 양은 무척 의젓해 보이네요.” 린나가 말했다.
“그래서 오히려 걱정입니다.” 류즈제는 화장대 앞에서 까치발을 들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자라온 집도 떠나 낯선 외국으로 가는데, 제 앞에서는 계속 신이 난 척하거든요. 그런데 어린 아이가 정말 외롭지 않을 리가 있을까요.”
“그럼 제가 가서 잠깐 이야기라도 나눠볼게요.”
린나는 장난감 인형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류이이는 반갑게 인형을 끌어안았다. 이에 린나는 그 곁에 쪼그려 앉아 아이와 머리를 맞댄 채 인형에게도 똑같이 머리를 땋아주자며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류즈제의 얼굴에 옅은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출발 전에 사실 좀 걱정했어요. 엘란티스가 전쟁 중이라고 들은 데다,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황일까 봐서요. 그런데 류 선생님이 따님을 데리고 그쪽으로 정착하신다니, 생각보다 상황이 괜찮은 모양이네요?” 스추가 물었다.
“엘란티스와 골로 제국이 싸우는 주 전선은 에미세트(艾米塞特) 지역입니다. 두 나라는 수백 년 동안 그 땅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을 별여왔고요. 무기야 갈수록 발전했지만, 결국 옛 갈등의 반복일 뿐입니다. 국내에 미치는 영향은 물가 상승 정도고, 그 외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수도 사페르는, 기묘하게도 전쟁 전보다 더 안전해졌으니까요.”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하죠.” 류즈제가 말했다. “혹시 ‘밀림’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그는 ‘밀림’이라는 단어를 엘란티스어로 한 번 더 되풀이했다. 스추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류즈제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렸다.
“엘란티스 왕국의 정보·치안 조직 말입니다. 꽤나 베일에 싸여있고, 정부 부처 명단에도 이름이 없으며, 총리 직속이라던데 사실입니까?” 자오징윈이 물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신비주의는 저런 정보기관들의 공통된 특징이지요. 우리나라 군사정보국이나 보안국도, 일반인인 우리로선 제대로 아는 게 없지 않습니까?”
류즈제는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결코 ‘일반인’이 아님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시추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자오징윈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간단히 말하자면, 밀림 조직은 전쟁 중 스파이 침투를 막기 위해 수도의 관리 체계를 대폭 강화했습니다. 원래 사페르는 인구가 많고 여러 사람이 뒤섞여 있어 통제가 쉽지 않았는데, 전쟁이 시작된 후 밀림 측이 주도해 전 시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신원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망 중이던 범죄자들도 많이 검거됐죠. 지금은 잠시 머무는 여행객부터 임차인까지 모두 신상 등록을 하고, 이를 정기적으로 경찰서에 제출해야 합니다. 세관 검문 역시 훨씬 엄격해져, 예전에는 화물 몇 상자만 무작위로 검사했지만 지금은 전부 검사를 받아야 하죠.”
“참, 한 가지 더.” 류즈제가 문득 떠오른 듯 자오징윈에게 말했다. “보안 회사답게 꽤 많은 무기를 가지고 오셨을 텐데요, 지금 세관에서는 총기류 신고가 필수입니다. 일부 무기는 금지품목에 포함되어 있으니, 배 안 독서실에 비치된 최신 <세관 규정>을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불필요한 문제를 피하려면요.”
“네, 알겠습니다.” 자오징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류즈제는 일행을 단품 식당으로 초대했다. 아침에 먹은 해물죽 덕분에 스추의 식욕도 점차 돌아와 무리 없이 음식을 즐길 수 있었고, 덕분에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한층 부드럽고 화기애애했다.
식사를 마친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가 낮잠을 청했고, 흑석공사 소속 네 사람은 독서실 원형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현재 상황으로 보아, 위 도련님이 류즈제 선생을 주시하는 이유가 상회 내 거처를 파악하려는 목적일까요?” 참모 팡위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린나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류즈제가 말한 사페르의 치안 상황, 위 도련님도 분명 알고 있을 거야.”
“근데 상회랑 여관이 뭐가 달라?” 양샤오산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회 쪽 숙소도 입주 신고는 하잖아?”
“신고야 똑같이 하지만, 움직임에 제약이 달라.” 자오징윈이 <세관 규정> 소책자를 넘기며 말했다. “여관에선 출입할 때마다 프런트 직원 눈을 피할 수 없고, 일반 주택에 세 들어 살면 주변 이웃의 시선도 있어. 반면 상회 소속 별관은 훨씬 더 독립적이지. 드나드는 상인들도 원체 바쁘고, 방은 그저 잠자는 용도일 뿐이라 옆방에 누가 있는지 관심조차 없어. 상회 전체 출입 인원도 워낙 다양하고 많아서, 그 자체가 훌륭한 위장 수단이 되는 셈이지.”
팡위가 턱을 짚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들어 자오징윈을 바라보았다. “군이 굳이 그렇게 은밀히 움직인 걸 보면, 이번 서대륙 행선지는 엘란티스 정부와의 접촉 때문이 아니라, 별도 임무가 있어서겠죠?”
자오징윈이 그를 똑바로 보며 짧게 대답했다. “맞아.”
“하지만 우리는 아직 군의 목적을 전혀 모르는 상태잖아요.” 린나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미 늦을지도 몰라요.”
자오징윈은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덮으며 조용히 말했다. “훠웨이닝을 따돌릴 방법, 있어?”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자오징윈은 단호하게 말했다. “위예 그 사람과, 단둘이 얘기해 봐야겠어.”
———
자오징윈이 끓인 해물죽이 맛있어 보여서 찾아본
<광둥식 게살새우죽 레시피>
재료: 쌀 1/2컵, 생새우 8~10마리, 게살 100g, 생강, 닭 육수 6컵, 소금, 후추, 대파, 참기름
*새우: 껍질을 벗기고 다질 것, 게살: 쪄낸 것, 시판용 대체 가능, 생강: 슬라이스 2~3쪽. 닭 육수: 물로 대체 가능.
1. 닭 육수에 30분 불린 쌀과 생강을 넣고 함께 끓인다. (중약불 30~40분)
2. 죽이 퍼지고 부드러워지면 다진 새우와 게살을 넣고, 5분 더 끓인다.
3.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고, 참기름 약간, 대파 고명을 올려 마무리한다.
#주의 사항#
쌀을 30분 이상 불릴 것, 죽이 눌러붙지 않게 자주 저을 것, 새우·게살을 너무 일찍 넣지 말 것, 무조건 약불, 간은 마지막에 맞출 것.
- 원문은 ‘杨柳的柳’으로 ‘양류의 류’. 양류(杨柳)는 버드나무를 뜻한다. 자연스러움을 더하기 위해 양류를 버드나무로 풀어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