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似我闻/灰墙之下

12장.

유유𓅨🦋 2025. 6. 11. 17:36
그의 사춘기는, 아직도 오지 않은 것만 같았다.


점심시간 무렵, 자오징윈은 교직원 사무동에 들어섰고, 문패 번호를 따라가 량옌의 사무실을 찾아냈다.

옌난공학의 교사들은 직급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씩 개인 사무실을 배정받으며, 그 안에는 따로 마련된 작은 휴게실도 딸려 있다. 이 시각, 정오의 햇살은 뜨겁고, 매미 소리도 한풀 꺾여 있었으며, 교정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랑옌도 역시 분명 방 안에 있을 터였다. 다만 아직 쉬고 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자오징윈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선생님, 저는 3반 학생입니다.”

곧이어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방문이 열렸다. 량옌은 자오징윈을 보고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학생, 아직 남은 질문이 있나요?”

‘질문’이라는 말이 나오자, 자오징윈은 아침에 했던 ‘선생님 남자친구 있으세요?’라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순간 부끄러움과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왔고, 미리 준비했던 말은 전부 소용없게 되어버렸다. “아뇨, 아니에요. 저는……”

량옌이 그를 바라보았다.

자오징윈은 그 시선을 받고 괜히 더 초조해졌다. 급히 주머니를 뒤져 만년필 캡을 꺼내며, 어색하지 않은 화제로 말을 꺼냈다. “이거, 돌려드리려고요.”

량옌은 눈빛을 살짝 움직이더니 손을 내밀어 캡을 받아 들었다. 표면에 난 흠집을 살펴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어쩐지 안 보이더라니. 그런데, 어디서 주운 거예요?”

“책상 옆이요.” 자오징윈이 설명했다. “이 캡이 의자에 걸려서 정위허가 넘어졌어요.”

“그래요? 그런 우연도 다 있네요.”

자오징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걔가 운이 없었죠.”

량옌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정위허한텐 말 안 했어요?”

“안 했어요.”

사실, 자오징윈은 요 며칠 정위허와 더는 말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불화를 굳이 선생님께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량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복도에 서 있지 말고, 안에 들어와서 앉을래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자오징윈은 정중히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 안은 단출한 구조였다. 책상 위에는 책과 종이, 필기구 외에 학교에서 지급한 검은 타자기 한 대만 놓여 있었다. 막 부임한 터라 아직 개인적인 물건은 놓지 못한 듯했다.

그의 등 뒤에서, 량옌은 바깥 복도를 훑어보았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문을 닫았다.

량옌은 몸을 돌려 호두나무 장식장을 열고 차통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비틀어 열면서, 안쪽 홈에 꽂힌 은침을 몰래 손바닥에 눌렀다.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학생 반은 오후 첫 수업이 체육인 걸로 기억하는데, 점심시간에 좀 쉬지 않고요?”

“괜찮아요.” 자오징윈이 대답했다. “선생님 휴식만 방해하지 않았으면 돼요.”

“그렇지 않아요. 저도 마침 할 일이 좀 있어서.” 량옌은 등을 돌린 채 물을 따라 차를 우려내며, 은침 끝을 찻물에 담가 살짝 저었다.

이 은침은 군사정보국 기술과에서 만든 것으로, 침끝에 신경 독소가 발라져 있다. 독소의 양은 극도로 정밀하게 조절되어 두 시간 뒤에 발현된다. 신경을 마비시키고 근육을 이완시키는 효과가 있다.

자오징윈이 정위허를 훈계한 장면을 목격한 만큼, 그가 위장을 간파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처리해야 할 잠재적 위험이었다. 두 시간 후는 체육 시간이다. 그때 독소가 발현되어 자오징윈이 가볍게 넘어져 다치고, 병원에 한 달 넘게 입원하는 것이면 충분했다.

량옌은 은침을 뚜껑 안쪽 홈에 다시 끼워 넣고 차통을 닫았다. 몸을 돌려 찻잔을 그의 앞 낮은 탁자에 올려놓고 다시 물었다. “만년필 캡을 돌려주려고 이곳까지 온 거예요?”

“아니요.” 자오징윈은 그 말에 일어나 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 양손으로 내밀었다.

량옌은 편지를 받아 펼쳐 보았고, 뜻밖에도 그것이 반성문임을 알게 되었다.

자오징윈은 몸을 약간 숙이며 진지하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첫 수업에 늦어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일부러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려던 게 아닙니다. 제 몇몇 친구들도 어젯밤 제가 약속을 어겨서 저를 놀리려 했고, 그로 인해 선생님께 피해를 끼쳤습니다. 그 말에는 다른 의도가 없으니 제발 마음에 두지 말아 주세요!”

량옌은 반성문 내용을 훑어보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가출해요?”

자오징윈: “어……”

량옌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자오징윈은 마지못해 억지로 설명했다. “그건, 저랑 아버지 사이가 원래 좀 긴장 상태라서요……”

말을 하다 말고, 자오징윈은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망했다. 갈수록 수습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량옌은 입꼬리에 살짝 힘을 주었다. 제법 흥미롭다고 느껴져, 그는 마음을 바꾸고 편지를 접어 넣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요, 학생. 학교 다닐 때 이런 식으로 자주 놀림 받았거든요.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자오징윈은 단숨에 죄책감이 밀려와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이건 전부 제 잘못인 걸요……”

“그렇지 않아요. 원체 운이 없는 편이라. 이 학교에 붙었을 땐 이제야 운이 트는 줄 알았는데,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요. 아마 이게 팔자인가 봐요.”

자오징윈은 다급히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일은 전부 제 잘못이에요. 선생님은 앞으로 분명 잘되실 거예요!”

량옌은 체념한 듯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에 놓인 타자기를 가리켰다. “오전 일만이 아니에요. 막 가져온 타자기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고장 났거든요.”

“타자기요?” 자오징윈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책상 앞으로 다가가 종이 한 장을 꺼내 타자기 틀에 끼운 뒤, 키를 몇 차례 눌러 보았다. 기계와 연결된 레버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확실히 완전히 고장 났네요. 새 걸로 바꿔야겠어요.”

량옌은 난처한 듯 그를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어요.”

자오징윈은 기억해냈다. 옌난공학의 후근[각주:1] 주임 천춘(陈存)은 한 푼도 아까워하는 인물로, 지위 높은 이에게는 아첨하고 지위 낮은 이에게는 얕보는 태도로 유명했다. 타자기라는 것도 본래 값비싼 기계인데다, 량옌은 아무런 배경도 없는 새로 부임한 교사였기에, 새 타자기를 요청하러 가면 괜히 트집 잡히고 곤란을 겪을 게 뻔했다.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자오징윈이 말했다.

“네?” 량옌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그……괜찮을까요?”

“괜찮아요.” 자오징윈은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하고 천 주임은 그런대로 사이도 나쁘지 않고, 그렇게 말 안 통하는 분도 아니에요.”

량옌은 여전히 주저하며 말했다. “괜히 학생에게 폐만 끼치는 건 아닐까요?”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사과 드리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량옌은 잠시 생각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학생.”

“천 주임은 지금쯤 점심 시간이라 쉬고 계실 거예요. 저는 오후 체육 시간 다음 수업이 자율 시간인데, 그 무렵이면 천 주임도 사무실에 계시겠죠. 선생님 그때 시간 괜찮으세요?” 자오징윈이 물었다.

“괜찮아요.”

“좋아요. 그럼 수업 끝나고 찾아뵐게요.”

약속이 정해지자 자오징윈은 곧바로 사무실에서 물러나겠다고 인사하고 떠났다. 량옌은 그를 문밖까지 배웅하고 돌아와, 낮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어 찻물을 개수대에 따라 버렸다.

햇빛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으나, 여전히 깃발처럼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1교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 아득한 울림에 고요했던 교정은 다시 깨어나 활기를 되찾았다.

운동장 위의 학생들은 모두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교사의 지도 아래 훈련을 마친 뒤 제각기 흩어져 자유롭게 움직였다.

3반의 남학생들은 늘 그렇듯 농구 시합을 벌였고, 몇몇 여학생들은 곁에 앉아 경기장 안을 달리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응원과 환호를 보냈다.

자오징윈은 팀에서 스몰 포워드[각주:2] 포지션을 맡고 있었고, 주된 임무는 슛과 득점이었다. 그것은 그가 가장 능숙한 일이기도 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조준하고 명중시키는 법을 타고난 듯했다. 보통 사람보다 나은 시력은 물론, 어떤 각도를 잡고 어떻게 힘을 조절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농구든 당구든 그가 던지는 공은 백발백중이었다.

아쉽게도 이번 경기는 무작위 추첨으로 짜인 팀원들과의 호흡이 그리 매끄럽지 못해, 공이 자꾸 상대편에게 중간에서 가로채이고 말았다. 경기는 이미 후반전에 접어들었고, 점수는 여전히 박빙이라 접전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구경하던 여학생들 역시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농구공이 ‘쿵’ 소리를 내며 골대를 맞고 튀어 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상대팀이 다시 한 점을 따내며, 양 팀의 점수는 다시 동점이 되었다.

코트 가장자리에 있던 몇몇 여학생들이 열띤 환호를 터뜨렸고, 자오징윈은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무심코 그쪽을 힐끗 바라보다가, 문득 동작을 멈췄다.

그 여학생들과 약간 떨어진 곳, 량옌도 코트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흰 셔츠는 햇빛 아래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자오징윈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 가볍게 인사했다.

자오징윈도 저도 모르게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러자 팀 동료가 소리쳤다. “자오징윈, 딴생각 하지 마!”

“공 받아! 공 받아!”

자오징윈은 급히 고개를 돌려, 날아오는 농구공을 받아냈다.
몸을 틀어 다가오는 상대 선수 두 명을 피하고, 자리를 잡아 도약한 뒤, 공을 던졌다. 농구공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정확하게 골망을 통과했다.

장거리 슛, 삼 점.

팀 동료들과 구경하던 이들이 동시에 환호를 터뜨렸다.

자오징윈은 다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량옌은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었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자오징윈은 시선을 거두었다. 이유 없이, 어딘가 긴장됐다. 아마,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지막 1분, 자오징윈은 평소보다 더욱 집중했고, 공격도 한층 적극적이었다. 상대가 가로챈 공을 다시 빼앗아내고, 수차례 둘러싼 방해를 뚫고 돌파하여 공을 던져 골망에 넣었다.

점수는 계속해서 쌓였고, 격차는 점차 벌어졌다.

종료 휘슬이 울렸고, 그가 속한 팀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팀원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치고, 다가와 그의 어깨를 연달아 두드렸다. 자오징윈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만 끄덕였다. 경기가 끝나자 다른 이들은 운동장 가장자리로 흩어졌고,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가자, 량옌도 일어나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 멋진 경기였어요.”

“선생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요?” 자오징윈이 물었다.

“이 두 시간 수업이 없어서, 마침 와서 한 바퀴 돌려고요. 학생이 다시 사무실 건물까지 가지 않아도 되게.” 량옌이 말하며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그의 왼쪽 뺨을 가리켰다.

자오징윈의 시선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그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피부는 빛을 받아 부드러운 옥처럼 하얗고 흠잡을 데 없었다. 그는 잠시 멍해졌다. “아?”

량옌이 다시 뺨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먼지가 좀 묻어서.”

“아.” 자오징윈이 손등을 들어 뺨에 힘주어 문질렀다. 묘하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 괜찮나요?”

“괜찮아.” 량옌이 몸을 숙여 옆 계단에서 한 병의 오렌지 소다를 집어 들었다. 투명한 유리병 속 선명한 액체가 흔들리는 가운데, 그는 병을 건넸다.

자오징윈은 또 한 번 멍해졌다.

량옌은 그의 머뭇거림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려 경기장 옆에 있던 다른 여학생들이 이미 오렌지 탄산음료를 나눠주며 조용히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구경하는 학생들이 모두 이 맛 탄산음료를 사던데, 무슨 뜻이 있나요? ‘기개개시[각주:3]’같은 건가?”

“아니에요, 그건 그 애들 여자친구들이고.” 자오징윈이 부끄러운 듯 말했다. “여자들 사이에 관례처럼, 좋아하는 사람에게 오렌지 소다를 준다고 해요.”

“……” 이번엔 진짜로 놀란 듯, 량옌은 유리병을 잡은 손을 거두려 했다.

자오징윈이 재빨리 받아 들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소다는 얼음통에서 꺼내 실외에 잠시 둔 상태였다. 유리병 표면에는 작은 물방울이 맺혀 그의 손가락에 스며들었고, 자오징윈은 그 차가움을 느꼈다.

량옌은 곧 평소처럼 돌아와 말끝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런데 학생 여자친구는 왜 보이지 않죠?”

“……저는 여자친구가 없습니다.” 자오징윈은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다.

“선생님, 제가 먼저 운동복을 갈아입고 나와서, 같이 천 주임님을 찾아뵐까요?”

“좋아.” 량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오징윈은 몸을 돌려 체육관 안의 1인용 탈의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렸고,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뺨을 더듬었다. 손바닥에도 유리병에 맺혔던 물방울이 묻어 있었고, 축축하고 서늘한 감촉이 닿자, 과연 얼굴이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날이 너무 더웠다.

자오징윈은 오렌지 소다를 옷장 선반에 올려두고, 먼저 샤워실로 들어가 씻었다. 물소리가 쏴아 울리고, 흰 김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의 생각은 흩어졌고, 방금 전의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학생 여자친구는 왜 보이지 않죠?

아마도 그는 여자아이들과 거의 접촉이 없어서일 것이다. 먼저 다가가는 성격도 아니고, 기분을 맞춰 웃게 하는 재주도 없다. 이 나이 또래 소년소녀들은 마음이 싹트고, 감정은 봄풀처럼 자라는데, 그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 어쩌면 그것이 자오청쥔이 그를 두고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고 말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 마음 깊은 곳엔 여전히 성난 반항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사춘기는, 아직도 오지 않은 것만 같았다.

자오징윈은 샤워기를 끈 뒤 몸을 닦고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닦으며 걸어나왔다.

그의 시선은 무의식중에 다시 그 병에 머물렀다. 선명한 주황색이 옷장 그림자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 병을 집어 들고 뚜껑을 열어 뒤로 젖혀 마셨다.

자오징윈은 오렌지 소다를 마셔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딘가 조금 달랐다. 소다 안의 잘게 터지는 기포가 약간의 저릿한 감각을 주었고, 오렌지 맛은 또렷했다. 약간 시면서도 달콤했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서늘함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체육관에서 나오자, 자오징윈은 한눈에 량옌을 발견했다. 그는 농구장 옆 푸른 나무 그늘 아래 서서 마침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경윤은 자연스레 걸음을 재촉하다가, 이내 천천히 달리기 시작해 그의 곁에 멈춰 섰다. “선생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량옌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체육관을 지나 후근부 사무실 건물에 도착했다. 후근부 주임 진춘의 사무실은 3층에 있었고,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사람이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춘은 마른 체격의 중년 남자로, 머리숱이 이미 듬성듬성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조경윤이 문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곧 미소를 지었다. “징윈, 이 시간에 왜 왔니? 수업 안 하나?”

“네, 이번 시간은 쉬는 시간이라서요.”

“천 주임님, 안녕하세요.”

소리를 듣고 천춘이 고개를 내밀어 보니, 자오징윈 뒤에 새로 온 역사 교사 한 명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게냐?”

“그게요.” 자오징윈이 말했다. “량 선생님 타자기를 잠시 빌려 썼는데, 갑자기 고장이 나서 키가 전혀 반응하지 않아요. 그래서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을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타자기 한 대가 고장 났다는 말을 듣고, 천춘은 안타까워 이마를 찌푸렸지만, 자오징윈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여전히 씩 웃으며 말했다. “괜찮지, 괜찮아. 타자기 한 대일 뿐인데, 일부러 나한테까지 올 필요 있나?”

한 대도 아니고, 설령 이 자오 대부호가 몇 대를 더 가져가 부숴가며 소리를 내든, 천춘은 그저 인정하며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량 선생님, 출고 기록에 서명해 주세요. 내가 결재해 드릴 테니, 조금 있다 지하 창고에 가서 한 대 받으면 됩니다.” 천춘은 책상 한쪽에 놓인 장부를 가리켰다. 말이 끝나자 그는 량옌을 쳐다보지 않고 일어나 자오징윈 가까이로 다가가 다정하게 물었다. “요즘 학교 생활은 어떻지? 필요한 게 있나?”

량옌은 고개를 숙이고 순하게 책상 앞으로 걸어가 출고 기록 장부를 조용히 치우자, 그 아래 입고 기록이 드러났다. 그는 두 권의 장부를 맞대어 자연스럽게 넘겼고, 최근 입고 기록이 지난주 수요일에 있었으며, 실험 기구 한 묶음으로 등록된 것을 보았다.

량옌이 눈을 들어 한 번 흘깃 보았다. 천춘은 온통 자오징윈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다른 데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자오징윈은 얼굴이 불편해 거의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장부를 출고 기록란으로 넘긴 뒤, 양식에 맞춰 신청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몸을 곧게 펴며 말했다. “천 주임, 서명했습니다.”

천춘은 한마디 대답하고 책상 앞으로 돌아가 출고 기록 장부를 끌어당겨 한 번 살펴본 뒤, 굵은 붓으로 쓱쓱 승인 도장을 찍어 량옌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고, 천춘은 뒤에서 덧붙였다. “징윈, 시간 나면 잊지 말고 자주 들러주거라.”

자오징윈은 얼버무리며 ‘음’ 하고 대답했고, 복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량옌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 수고했어요, 학생.”

“괜찮아요, 이미 익숙해졌어요.” 자오징윈이 말하며 그와 함께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이 층은 전체가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칸은 예비 물자 보관 창고, 다른 한 칸은 폐기 물자 보관 창고였고, 두 창고의 문마다 무거운 놋쇠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복도에는 또 하나의 작은 방이 있었는데, 그곳은 창고 관리인이 상주하며 지키는 감시실이었다.

관리인은 쪽지를 받아 들고는 후근 주임의 필적을 확인한 뒤, 허리춤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문 앞에서 기다릴 줄 알았던 량옌이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따라 자오징윈까지 함께 들어오자 그만 입을 떼려던 말이 목에 걸렸다.

자오 큰 도련님을 보고도 나가달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관리자도 한순간 생각한 끝에 별일 없을 것이라 여겼고, 둘 앞에서 작은 열쇠를 책상 아래 첫 번째 서랍에 꽂아 돌린 다음, 안에서 놋쇠 고리 하나를 꺼냈다. 거기엔 길쭉한 손잡이의 열쇠 두 개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예비 물자 창고 앞으로 가서 자물쇠를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일부러 한마디 일렀다. “창고 안 공기가 안 좋으니, 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네, 신세 좀 지겠습니다.” 량옌이 응하며 문밖에 서 있었다.

창고 안에는 평소 사용하는 등 하나만 켜져 있어 빛이 어두웠고, 안쪽 선반마다 박스가 가득 쌓여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인이 한 상자를 안고 나와 말했다. “량 선생님, 며칠 안에 고장 난 타자기를 창고로 가져오는 걸 잊지 마세요.”

“네.”

“제가 들게요.” 자오징윈이 손을 뻗어 상자를 받았다. 제법 무거웠고, 타자기라 그런지 꽤 묵직했다.

량옌이 그에게 미소 지은 뒤, 관리인 쪽으로 돌아서서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한 개비 내밀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각주:4]

관리인은 담배가 고급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고 급히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량 선생님, 이렇게까지 챙겨주시다니요.”

오히려 자오징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량옌의 절제되고 온화한 옆얼굴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울 만한 사람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은 후근 사무동을 나와 나무 그늘이 드리운 길을 지나 교사 사무동으로 돌아갔고, 량옌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오징윈은 종이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뜯은 뒤, 새 타자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얀 종이 한 장을 꺼내 기계 틀에 넣고 키를 두드리자, 매끄러운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하나하나의 활자가 종이 위에 나타났다.

자오징윈이 잠시 생각하다가 몸을 돌려 량옌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아까 일이 꽤 순조로웠나요?”

“네.” 량옌은 무슨 뜻인지 잘 몰라 고개를 끄덕였다.

자오징윈은 웃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순조로우실 거예요.”

량옌은 잠시 멈칫했다가, 전에 자신이 말한 일이 순조롭지 않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자오징윈은 몸을 곧게 세우며 말했다. “그럼 전 수업하러 가보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잘 가요.”

량옌은 자오징윈을 문 밖까지 배웅한 뒤 돌아서 문을 단단히 닫았다. 그의 얼굴에 있던 온화한 미소는 사라졌다. 책상 앞으로 돌아가 고장 난 타자기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잠시 머뭇이다가 무언가 떠올라 책상 서랍을 열고 정밀한 톱니바퀴 하나를 꺼냈다.

점심 휴식 시간, 자오징윈이 문을 두드리기 전, 그는 막 이 타자기 내부에서 핵심 부품을 분리한 참이었다.

그가 손쉽게 그것을 던지자, 톱니바퀴는 황동빛 활 모양으로 휘어져 쓰레기통 속으로 떨어졌다.






  1. 後勤; 후근. 조직이나 기관의 뒷받침을 맡는 부서. 학교 기준으로는 행정, 시설, 물품 등을 관리하는 부서를 뜻한다. [본문으로]
  2. 小前锋; Small Forward. 스몰 포워드. 농구에서 3번 포지션으로, 공격과 수비 모두에 능한 다재다능한 선수. 주로 득점과 리바운드, 공간 활용에 능하며, 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본문으로]
  3. 旗开得胜;기개개시. 중국어 관용어로 ‘깃발을 들고 출전하여 즉시 승리를 거둔다’는 뜻이다. 본래 군대에서 깃발을 올리며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승리했다는 데서 유래했으며, 지금은 어떤 일을 시작하자마자 순조롭게 성공하거나 좋은 결과를 얻는 상황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본문으로]
  4. 중국에서는 고급 담배를 건네는 행위가 단순한 선물 이상의 ‘존중과 감사’ 표현으로, 이런 작은 예절이 관계의 미묘한 위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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