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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유질부 완결편 신번외 번역

丹英 2025. 4. 24. 05:22



아마도 양주[각주:1]에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길가에는 유랑하는 백성들이 점점 많아졌고, 그 무리는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강물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강물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흐르고 있었다. 가족을 이끌고 짐을 멘 이들은, 성이 함락하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들이었다. 반면 많은 이들은 홀몸으로, 빈손으로 그저 앞을 향해 무작정 걸어가고 있었다. 꼭 내쫓긴 외로운 혼령들 같았다.


소세예는 고삐를 단단히 쥐고, 말을 탄 채 그들 곁을 지나며 조용히 살펴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미 무감각해진 슬픔이 드리워 있었고, 공허한 눈빛에는 종종 방향을 잃은 듯한 허망함이 엿보였다. 고향을 잃은 이들은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걷고 있을 뿐이었다.

소세예는 일찍이 유랑민들에게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를 보좌하던 부장 임용(任勇)은 인파를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발걸음이 빠르고 정신이 또렷한 이들은 의지할 친척이 있는 사람들이고, 짐을 지고 이리저리 수소문하는 이들은 정착할 만한 안전한 곳을 찾고 있는 이들이며, 무리를 이룬 그나마 젊고 힘이 있는 남자들은 대략 어느 주부(州府)에 가서 병사로 지원하려는 사람들일 거라고 했다.

“그럼, 저렇게 혼자 남은 노인들과 아이들은?”
소세예가 물었다.


임 부장은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을 뿐, 이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소세예는 길가의 진흙탕에 쓰러져 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남루한 옷자락을 꼭 움켜쥔 채 웅크린 자세로 죽어 있었다. 그제야 그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의지할 사람도, 먹을 것도, 추위를 막을 옷도 없는 외로운 노인과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찬비 한 번조차 견디지 못하고, 애초에 양주를 벗어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당시 열다섯이었던 소세예는, 바로 그런 죽어간 아이들과 같은 나이였다. 그래서 임 부장이 굳이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문득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소세예를 스쳐 지나갔다. 날카롭고 앳된 눈이었다. 밝고 선명하며, 차갑게 불타오르는 듯했다. 그 시선은 마치 이 양주성으로 향하는 무리 전체를 냉정하게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소세예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뒤돌아 그 시선을 쫓았다. 그러나 그 시선의 부인은 이미 사람들 속에 묻혀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아마 소세예와 비슷한 나이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혼자 고립되어 있었는데, 얼굴은 연기에 그을렸는지 흐릿했다. 비록 굳은 결의의 눈빛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가냘프다. 그가 얼마나 더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소장군, 무슨 일입니까?”
임 부장은 그가 멈추자 말을 타고 다가와 물었다.

“아니, 괜찮다.”
소세예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재촉했다.
한참 후, 그는 입을 열었다.
“이 유랑민들을 위해, 나는 반드시 양주성을 되찾을 것이다.”

임 부장은 이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겁니다! 암요, 당신은 소 대장군의 외아들이니까요!”

그때 그의 웃음과 말은 소세예에게 큰 자신감과 격려를 주었지만,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질 때까지 그 말이 아마도 자신을 조롱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4천 병사가 매복에 걸려 전멸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소세예는 포박되어 말등에 실려 흉노인의 진영으로 끌려갔다. 전리품처럼, 임용은 그를 흉노의 주 장수인 우문효(宇文骁)에게 바쳐 공을 세울 참이었다.

그들을 토벌하는 이 부대는 오늘 밤 막사를 치고 쉬며, 내일 대군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막사 밖에서는 흉노 병사들의 술에 취해 흥분한 함성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마도 대승을 자축하는 소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구호를 외치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소세예는 그들의 승리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의 손발은 모두 밧줄로 꽁꽁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임용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자, 바깥에서 지키고 있는 두 명의 병사가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오직 두 명뿐이었다. 허술한 경계를 통해, 소세예는 임용이 자신의 신분을 사실대로 알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머리가 뜨거워진 흉노인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임용은 작은 칼을 들고 다가와, 몇 번 긋는 것으로 소세예의 밧줄을 끊었다. 그리고 그에게 한 덩이의 빵을 던져주며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는 양고기 한 덩이가 놓인 작은 쟁반이 있었다. 임용은 흉노인들처럼 칼로 고기를 썰고 먹기 시작했다.

소세예는 자신의 팔목에 남은 밧줄 자국을 보며,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내일이면 이 부대가 출발할 것이고, 그는 또 화물처럼 운반될 것이다. 혹은 그보다 더 일찍, 임용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를 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문효를 만날 날이 오면, 그는 무슨 대면을 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도망칠 기회도, 그럴 힘도 없었다.

소세예는 임용이 손에 쥔 칼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칼끝이 번쩍였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기회였다.

소세예는 품에 든 빵을 움켜잡아 임용에게 던졌다.
임용은 전혀 놀라지 않고 돌아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뭡니까, 입맛에 맞지 않나보죠?”

소세예는 이전과는 다른 이례적인 침착함을 느꼈고, 얼굴에 분노를 가득 담은 척 하며 대답했다.
“흉노인들이 너에게 무엇을 약속했길래, 네 고향과 나라를 저버리려 드는 거지?!”

“그건 소장군께서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임용은 웃으며 말했다.

“뭐가 되었든, 흉노인들은 절대로 너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다!”
소세예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임용의 고기를 써는 손이 잠시 멈춘 것을 눈치챘다.

임용은 얼굴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소세예의 저항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지만, 그 짧은 순간의 반응은 소세예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에게는 흉노의 주 장수인 우문효가 약속을 이행하게 할만한 충분한 힘과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소세예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소세예는 크게 외쳤다.
“네가 흉노인처럼 말하고 행동해 봤자 아무 소용없어. 네가 아무리 외양을 바꿔도, 결국 너는 한인이야! 내가 어리석다고? 나는 네가 나보다 천 배는 어리석다고 본다! 우문효는 일찍이 한인을 양처럼 길들이려 한다고 말했는데, 그가 너와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다니. 너를 그저 술에 곁들이는 우두머리 양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니고?”

“입 다물어!”
임용이 그를 꾸짖었다.
“네가 뭘 안다고, 감히 여기서 함부로 지껄이는 거지?”

“모를 수가 없지!”
소세예는 몇 걸음에 그에게 성큼 다가섰다.
“나는 안다, 우문효 앞에 가면 내가 너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나는 절대 네게 공로를 과시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원하는 것을 주고, 그가 네 살갗을 벗겨 접시에 담도록 할 것이다!”

“네가 감히!”
임용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소세예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쥔 채, 고기를 썰던 칼을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네 혀를 지금 당장 도려내 버리겠다!”

“그럼 왜 하지 않는 거지?”
소세예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뭐가 두렵길래?”

임용은 분노에 휩싸여, 칼을 거세게 내리눌렀고, 칼날은 즉시 살갗을 갈라 핏방울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그 피가 그의 정신을 자극했고, 그는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급히 칼을 던지고는, 소세예의 얼굴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고, 여전히 ‘보기 좋은 전리품’으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소세예는 작은 칼이 낮은 탁자 위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즉시 위치를 파악하여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한 거대한 손이 그의 목을 움켜잡고,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목이 조여 숨이 막히는 고통이 밀려왔고, 시야에는 남자의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발은 허공에 떠 있었으며, 하얀 천막의 천장 쪽 천이 그의 머리 위에서 흔들렸다. 소세예는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였다. 분노에 휩싸인 임용이 정말로 그를 목 졸라 죽이려는 것일까 의심이 들었다. 그는 두 손으로 힘껏 긁어가며 남자의 거친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쇠처럼 단단한 손아귀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점차 소세예의 시야가 흐려지고, 정신이 희미해졌다.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었다.

마지막 순간, 임용은 손을 놓고 소세예를 바닥에 거칠게 내던졌다. 그는 낮은 탁자를 넘어뜨렸고, 접시가 ‘쾅’ 소리를 내며 융단 위에 떨어졌다. 양고기는 멀리 흙바닥으로 굴러갔다. 소세예는 등을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넓은 소매로 목을 감싸며 격렬하게 기침을 했고, 오랫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를 혼내준 후, 임용은 조금이나마 화가 가라앉았다. 그는 소세예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무서운가? 그럼 기억해, 아가씨. 힘을 아껴라. 나는 당신을 불구로 만들어 바치고 싶지 않거든.”

“……”

임용은 그의 얼굴의 상처를 다시 확인하고자 몸을 낮추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됐으니까, 그만 울고———”

거의 동시에, 소세예가 고개를 들고 엄청난 힘으로 반격했다. 한 손으로 임용의 입을 막고 그를 바닥에 눕혔으며, 다른 손으로는 작은 칼을 들고 그의 목을 깔끔하게 그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임용은 눈을 크게 뜨고 소세예의 턱에 튄 피를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 전 소세예가 소매로 그 작은 칼을 감추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용은 격노하며 몸부림쳤지만, 입과 코가 단단히 막혀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눈에 핏발이 섰고, 손을 뻗어 다시 칼을 빼앗으려 발버둥쳤다.

그러자 소세예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 칼은 내 것이다.”

임용은 순간 멈칫하였고, 곧 가슴에 차가운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온몸을 크게 떨었고, 소세예가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이 칼은……”

그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소세예는 차분하게 익숙한 이름과 얼굴들은 하나하나 떠올리며, 일흔한 번 칼을 휘둘렀다. 그 후, 그는 일어나 이미 숨이 끊어져 진흙덩이처럼 변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묻은 끈적한 피를 닦고, 작은 칼을 깨끗이 닦아 소매 안에 숨겼다.

소세예는 천막 밖에 서 있는 두 개의 그림자를 힐끗 보았다. 병사가 놀라지 않도록 안에서 다투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천막에서 등잔불을 찾아냈고, 임용의 거적데기가 된 옷을 찢어 기름에 흠뻑 적신 후, 천막 주위에 던졌다. 마지막으로 불을 붙이자, 불꽃이 치솟아 하얀 천막을 붉게 물들였다.

소세예는 불길 속에 서서 경비병들이 놀라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도움을 청하러 달려간 것 같았다. 그에 그는 두꺼운 융단을 머리 위로 덮고 몸에 두른 뒤, 몸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숨을 죽인 채 불길을 뚫고 천막을 빠져나왔다.

밤바람이 몰아치자, 불이 붙은 융단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고, 소세예는 서둘러 그것을 맞은편의 또 다른 천막 쪽으로 던졌다. 그 천막도 곧바로 맹렬히 불탔으며,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사방을 가렸고, 어렴풋이 보이는 흉노 병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 혼란을 틈타 소세예는 어둠이 드리운 구석들을 이용해 흉노의 진영을 빠져나왔다. 결코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달렸으며, 멀리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그 진영이 희미한 검은 연기만 남은 상태였다. 그제야 그는 지쳐 발걸음을 멈추었다.

힘이 풀리자, 그는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황량한 사막의 밤은 혹독하게 차가웠고, 달빛은 사방을 설원처럼 밝히고 있었다. 소세예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고, 차갑게 식은 눈물을 느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기억 속 마지막 눈물은 아니었다.

아홉 해 뒤, 대장군 소결(苏决)은 지난날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이 발작하여 병을 얻었고, 반년을 가까스로 버틴 끝에 끝내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의복도 벗지 않은 채 곁을 지켜온 소 부인은 그 충격에, 피를 토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궁에서 부른 어의들이 차례로 다녀갔지만, 그들의 답은 한결 같았다. 고개를 젓고 “애도하소서”라는 말뿐이었다.

장례를 주관하던 집사 소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세예를 바라보며 부인의 장례도 미리 준비하면 좋을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소세예는 담담한 얼굴로, 이미 아월에게 편지를 보내 의성께 다시 경성에 와달라고 기별을 넣었으며, 이전의 약 한 첩이 아버님의 목숨을 이어주었으니, 어쩌면 이번에도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답했다.

애석하게도 의성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먼저 도착한 것은 소 부인이 깨어났다는 소식이었다.

시녀가 알리러 왔을 때, 소세예는 집사와 함께 장례 연회의 준비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는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고, 약간의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부인께서 곧장 대인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시녀가 덧붙였다.

소세예는 연회 명단을 내려놓고 이에 응한 뒤, 시녀를 따라 내당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니, 소 부인은 베개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얼굴에는 생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 한켠에 감도는 불길한 예감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어머니’를 불렀다.

소 부인은 손을 들어 그를 부르며 말했다.
“오랜만에 네 거문고 연주가 듣고 싶구나.”

“무엇을 연주해 드릴까요?”
소세예는 하인을 시켜 거문고를 가져오게 했고, 소 부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좋단다.”

소세예는 잠시 생각한 뒤, 손끝으로 현을 튕겼다. 가볍고 온화한 선율이 반복되었다. 이는 소 부인의 고향 임안(临安)의 곡조이자, 그녀가 소세예에게 처음으로 가르친 곡이었다.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소 부인은 조용히 몸을 돌리며 울음을 감추려 했지만, 끝내 두어 번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소세예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에 앉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왜 우시는 거예요?”

소 부인은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착한 아이야, 어머니가 네게 미안하구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내 몸이 약해서 너 하나밖에 낳지 못했지. 형제자매도 없이 너 혼자 자라게 했고. 몇 해 전, 네 아버지가 네게 혼사를 맺어주려 하셨을 때, 내가 말렸어. 이미 아이의 뜻을 꺾었으니, 좋아하는 사람은 스스로 택하게 하자고 말이야. 나는 늘 바랐단다. 너의 손을 잡은 채 환하게 웃는 여인을 데려오는 모습을. 그런데 이럴 줄은 몰랐는데……”
소 부인의 눈물이 떨어졌다.
“나와 네 아버지가 먼저 떠날 줄은, 그것도 너만 세상에 외로이 남겨두고.”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소세예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아월과 그의 사부께서 상경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분명 회복되실 거예요.”

“이 지경이 되었는 데도, 내 몸을 내가 모를까. 내가 놓을 수 없는 건 오직 너 하나뿐이야. 그날 이후, 너는 점점 마음을 닫았잖니.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는 걸 본 적이 없어. 혼사는 말할 것도 없으니, 내가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내가 가면 누가 너를 돌봐줄까?”

소세예는 말이 없었다. 소 부인은 그의 손을 떨리는 손으로 밀어내고,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의 어리석은 아들아, 혼자 고생하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해 주렴, 더는 혼자 외롭게 살지 않겠다고.”

“어머니……”

“약속하거라!”
소 부인은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며 거의 간절히 애원하듯 말했다.

소세예는 목구멍이 뭔가에 틀어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애처로운 눈빛을 저버릴 수 없었다.
“알겠어요.”

바로 그 순간, 그의 눈물은 떨어졌다. 소 부인의 창백한 뺨 위로 떨어진 눈물은 그녀의 눈물과 섞였고,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소 부인은 조용히 잠든 채 세상을 떠났다. 소 가에는 흰 비단이 가득 걸렸고, 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곁을 지키던 어의는 이렇게 위로했다.
“소 대인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부인께서는 평온히 떠나셨습니다.”

상중을 마친 뒤, 소세예는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 밀린 공무를 처리하느라 며칠간 분주하게 지냈고, 아예 어사대에 기거하며 집으로 돌아갈 틈조차 없었다.

그 무렵, 이연정이 대신들을 불러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소세예는 사유를 들어 참석하지 않으려 했으나, 뜻밖에도 전갈을 보냈던 소태감이 다시 돌아와 폐하께서 어사대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연회에 꼭 참석할 것을 직접 명했다고 전했다. 소세예는 이것이 이연정의 배려임을 알고, 더는 거절할 수 없어 마지못해 응했다.

그날 밤 연회는 여전히 시끌벅적하고, 소세예는 상복 중이었기에 술 대신 차를 마셨다. 모두가 흥겹게 취해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스스로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음을 느끼고, 틈을 타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걷다 보니, 어느덧 태야太夜 연못가에 다다랐다.

서늘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왔다. 소세예는 심호흡을 했다. 답답했던 가슴이 그제야 조금 풀리는 듯하였다.

그때, 멀지 않은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세예는 그제야 누군가가 그곳에 있음을 알았지만, 어둠 속의 모습은 흐릿하여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밝은 눈동자 한 쌍만이 눈에 띄었다.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 대인?”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소세예는 단번에 그가 위장군(卫将军) 초명윤임을 알아차렸다.

대장군 소결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초명윤의 위로는 더 이상 그를 견제할 자가 없었다. 병권은 거의 그 한 사람의 손에 쥐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크게 의기양양할 때일 터, 소세예는 그와 굳이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에, 공손히 예를 갖춰 말했다.
“초 대인의 한적한 시간을 방해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아닙니다.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소세예는 발걸음을 멈췄다. 예를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서서 입을 열려는데, 초명윤이 불쑥 말을 이었다.
“오늘 밤은 보름이라.”

밑도 끝도 없는 한 마디에, 소세예는 의아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초명윤은 이미 시선을 다른 데로 옮겼고, 그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검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둥근달이 떠 있었다. 가을밤의 달은 흠결 없이 차오른 옥반처럼 유난히 크고, 차갑게 빛나며 연못물을 은빛으로 반짝이게 했다.

“과연, 가을의 달은 차갑구나.”
소세예는 나지막이 말했다. 문득, 흉노의 막사를 빠져나오던 그 밤이 떠올랐다. 그날 밤도 이런 차가운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사막의 달빛처럼.”

그 순간, 소세예는 멍하니 얼어붙었다. 그 목소리는 그의 기억 속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었다.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람, 초명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섬세한 감정이 담겨있다. 의아해진 그가 시선을 돌려 초명윤을 바라보았으나, 상대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이미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소세예는 시선을 거두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여전히 그 자리에 걸린 채, 태고의 밤처럼 고요히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융화 4년의 가을밤, 만물이 숨을 죽이고 고요히 잠든 순간이었다.








  1. 凉州;양주. 현재의 양저우. 장강과 경항대운하 교차 지점에 위치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