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보국의 문턱이 이렇게 낮아진 겁니까?”
귀빈칸 연회는 늘 그렇듯 석식 이후에 열렸다. 연회장은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대형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부드러운 빛을 쏟아내고, 벽 곳곳마다 촛대를 든 인어 조각상이 놓여 은은한 광채를 더했다. 악단은 지칠 줄 모르고 연주를 이어갔으며, 승객들은 값비싼 구두를 신고 정교하게 짜인 원목 바닥 위를 음악에 맞춰 유려하게 미끄러졌다.
“어떠세요, 객실에 머무는 것보다 훨씬 즐겁지 않으신가요?” 린나는 환하게 웃으며, 정중히 초대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렇네요.” 스추는 예의 바르게 답하고는 연회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조용히 그러나 면밀하게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위 도련님께서 눈에 들어오는 아가씨가 계시다면, 꼭 용기 내어 청해보세요. 서대륙에서 수술을 마치고 돌아오실 즈음엔 혼담 이야기가 오갈지도 모르잖아요.” 린나는 시선을 옮기며 부드럽게 웃었다가, 이내 덧붙였다. “훠 박사님도 마찬가지예요.”
훠웨이닝은 머쓱하게 웃으며 시선을 잠시 옆쪽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아가씨들에게 흘렸다. 그러나 곧 스추의 걸음을 바짝 따랐다.
“그런데 어찌 제가 곁에 계신 숙녀를 혼자 두겠습니까.” 스추는 느긋하게 말했다.
린나는 그 말이 곧 자신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웃음을 머금은 채 일부러 타박하는 듯 말했다. “위 도련님께선 어째 제가 초대를 못 받을 거라 단정하시는 거죠?”
스추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그저, 아름다운 숙녀 앞에선 다른 분들이 기가 죽어 감히 다가서지 못할까 염려됐을 뿐입니다.”
이 매혹적인 남자의 언변은 단연 돋보였다. 린나는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던 팡위는 군중 사이에 섞인 채 조용히 시선을 따라갔다. 이윽고 트레이를 든 웨이터 한 명을 불러 세웠다. “저기 계신 숙녀분께 샴페인 한 잔만 전해주시겠어요.”
“네, 선생님.”
웨이터가 몸을 돌려 린나 쪽으로 다가갔다.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린나가 마침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조심해요!”
하지만 이미 늦었다. 린나는 무언가 말하려다 손을 들었고, 그 손이 웨이터가 들고 있던 쟁반을 치고 말았다. 몇 잔의 샴페인이 앞다퉈 쏟아지더니, 가장 가까이 있던 훠웨이닝에게 고스란히 끼얹어졌다. 셔츠는 순식간에 흠뻑 젖어 물이 뚝뚝 흘러내렸고, 유리잔도 바닥에 떨어져 와르르 깨져버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웨이터가 허둥지둥 바닥의 깨진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세상에!” 린나도 당황해 뒤돌아보며 외쳤다. “다 제 잘못이에요. 훠 박사님,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훠웨이닝은 급히 손을 저으며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즐기세요. 저는 이따가 다시 오겠습니다.”
스추가 고개를 끄덕이자, 훠웨이닝은 곧장 홀을 빠져나갔다.
린나는 그의 뒷모습이 연회장 유리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전날 연회에서 만난 파트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남자는 그녀 곁에 선 스추를 흘끗거리고 있었고, 시선을 마주치자 미소 띤 얼굴로 묻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린나가 미소로 답했다.
남자는 상황을 알아챈 듯 공손히 다가와 린나에게 춤을 청했다.
린나는 스추를 향해 미안한 듯 말했다. “오늘 밤은 잠시 위 도련님을 혼자 두게 될 것 같네요.”
“괜찮습니다.” 스추가 웃으며 말했다. “부디 밤을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남자는 스추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린나의 손을 이끌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스추는 이 연회에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이 기회를 빌려 일등석 승객들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한쪽 구석의 빈 소파에 앉았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무심히 고르며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자오징윈이었다.
스추의 등줄기가 순간적으로 굳었다. 이번 ‘배치’의 의도를 즉시 알아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샴페인 잔을 들었다. 그는 천천히 한 모금 마시며 시선을 춤추는 연회장의 인파 위에만 두었다.
자오징윈은 그를 보지 않고 앞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이 연회에 큰 흥미를 느끼는 듯했지만,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만큼의 크기였다. “군사정보국의 문턱이 이렇게 낮아진 겁니까? 그런 수준으로도 당신 새 부관이 될 수 있습니까?”
스추는 잠시 망설이다 설명했다. “그는 제 부관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사람입니까?”
스추는 자오징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게 자오 선생님과 무슨 상관입니까?”
“……”
“저희 사이의 협의를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고용인의 사적인 사항은 묻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자오징윈도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맞췄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고용인과 임무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지요.”
“이미 충분히 말씀드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우 국장께서 칠백만을 지불한 이유가 단순히 경호 업무 때문이라고는 믿기 어렵군요.”
“그 점에 대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대신 전해드릴 수 있습니다.” 스추가 말했다.
자오징윈은 응수했다. “저는 직원의 안전에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용인의 진짜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요?” 스추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지금쯤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해서 돌아가시겠다는 겁니까?”
자오징윈은 스추의 안경 너머 시선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왜 하필 저입니까?”
스추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희미해졌다. 그는 시선을 돌려 연회장의 한 곡을 마치며 서로 인사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샴페인을 다 마신 뒤에야 답했다.
“당연한 이야기지요. 당신의 부친이 가진 인맥과 자원은 제게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결국 저는, 자오청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쓰이는 겁니까?” 자오징윈이 물었다.
스추는 들고 있던 빈 잔을 세게 움켜쥐었다. 말문이 막힌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자오징윈이 낮게 말했다. “당신은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장관님.”
스추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직원의 안전을 생각하신다면, 처음 만났을 때 협력을 거절하셨어야 합니다.”
“칠백만의 계약을 거절할 회사는 없습니다.”
“자오 도련님, 정말 그 돈이 필요하셨던 겁니까?” 스추는 우스운 듯 말했다.
“저는 평소 회사에서 지냅니다. 집에는 가끔만 들르지요. 아버지가 회사 지분 10%를 고집하신 것 외에는, 그분의 돈을 쓴 적이 없습니다.” 자오징윈이 말했다. “그리고 제 아버지는 군사정보국의 중점 감시 대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셨습니까, 장관님?”
“그건 정보처의 일입니다. 저는 청 처장에게 그런 사항을 묻지 않아요.”
“……저에 대해서도 전혀 묻지 않으셨습니까?” 자오징윈이 조용히 물었다.
스추는 심장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숨을 삼키려 애써 입을 다물고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런 그를 자오징윈은 조용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제가 무슨 이유로 당신에게 중요한 존재였던 겁니까, 자오 선생?”
‘자오 선생’이라는 호칭이 또렷하게 발음되었다.
스추는 말을 이었다.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어떤 관계라도 있었습니까?”
자오징윈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스추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깊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된 그는, 관자놀이 쪽으로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고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자오징윈을 바라보았다. 굳은 옆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과했을까. 스추는 잠시 망설이다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정말 직원과 회사를 생각하신다면,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모두 실명으로 움직이고 계시니까요. 만일 일이 잘못되어 추적당하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이면 단순히 고용인에게 이용당한 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자오징윈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스추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건 그저 하나의 의뢰일 뿐입니다. 귀사에서 맡아온 다른 계약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일을 괜히 복잡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용병은 대가를 받고 일하는 직업이니까요.”
그때, 스추의 시야에 한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갈아입은 옷차림의 훠웨이닝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쯤에서 대화를 마칠 타이밍이었다.
스추는 안도하며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자오징윈 역시 훠웨이닝을 발견하고는 일어섰다. 하지만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추 앞에 선 채로, 한 손을 뒤로 감추고 오른손을 내밀며 우아한 초대 동작을 취했다.
스추는 순간 멍해졌다. 몇 걸음 떨어진 훠웨이닝도 놀라 멈춰 섰다.
“고용인에게 춤을 권하는 용병이 어디 있습니까?” 스추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오징윈은 담담히 응수했다.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왈츠 선율이 여전히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물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페어들이 어깨를 맞대고 돌며, 공기에는 묵직하면서도 은은한 향기가 흩날렸다. 1
현윤 황제가 발표한 <신조법령> 제113조, 이른바 ‘진애법령’ 덕에, 성인 간의 자발적인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지금, 이런 장면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자오징윈의 행동도 딱히 주목받지 않았고, 그저 린나만이 고개를 들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살폈다.
스추는 자오징윈과 시선을 맞춘 채 한동안 말을 아꼈다. 그러나 끝내, 손을 내밀었다.
검은 장갑을 낀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펼쳐진 손 위에 얹혔고, 곧 자오징윈이 그 손을 붙잡아 끌어안았다. 그의 팔이 시추의 등을 감쌌다.
스추는 손을 자오징윈의 어깨에 올렸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둘 사이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엔 자연스레 경직된 기색이 묻어났다. “당신 직원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압니다.” 자오징윈은 낮게 속삭였다. 숨결이 귀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 뭔가 남았습니까?”
자오징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박자에 맞춰 조화를 이루며, 연회장 안을 유유히 누비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다른 이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퍼졌지만, 이 향락의 축제 한가운데서 유독 이들 사이에만 고요함이 흘렀다.
잠시 후, 스추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말할 준비가 안 되셨습니까?”
“그렇게 급하신가요?” 자오징윈이 되물었다.
스추는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응시하며 말했다. “급하지는 않습니다. 이 곡이 끝나기 전까진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 순간, 자오징윈의 손끝이 스추의 등에서 살짝 조여왔다.
“실은 고용인께 여쭐 일이 하나 있습니다.” 자오징윈이 말했다. “엘란티스 왕국의 최신 <세관 규정>을 확인한 결과, 권총은 신고 후 반입이 가능하지만, 대형 화기는 금지 품목으로 분류되어 있더군요. 허가증이 있어도 소용없고, 적발되면 약 1년의 구금 처분이 내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요?”
“저격총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그 총을 버릴 생각은 있으십니까?” 스추가 물었다.
“고용인의 제시 가격에 달려 있겠지요.” 자오징윈이 냉정하게 답했다.
스추가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협박하시는 겁니까?”
자오징윈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저 공정한 거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거래를 원하십니까?”
자오징윈이 질문을 이어갔다. “당신이 서대륙으로 가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추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꼭 알아야만 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와 다른 세 사람은 당신의 계획에 협력할 수 없습니다.”
스추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오징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아니면, 훠 박사 한 명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말은 한 적 없습니다.”
“그렇다면,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왈츠 음악이 서서히 잦아들었고, 스추는 멈춰 서서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그는 자오징윈의 어깨에 얹은 손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났다. 주변의 다른 페어들도 몸을 떼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자오징윈은 여전히 그의 오른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제 끝났습니다, 자오 선생.” 스추가 조용히 말했다.
자오징윈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을 놓았다.
- 圆舞曲; 원무곡. ‘원무곡’은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3박자 무곡으로, 주로 사교 무도회에서 연주되는 춤곡이다.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리듬이 특징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