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의 신분이 노출되면, 우리가 지금껏 들인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팡위와 양샤오산은 곧이어 따라 나왔고, 세 사람은 복도 끝 계단 입구까지 함께 걸어갔다. 더는 들킬 일이 없다고 판단되자 팡위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이 의뢰를 꼭 맡으시겠다는 거군요?”
“괜찮잖아! 고용주가 좀 까다롭긴 해도, 칠백만을 제시했는데 못 참을 게 뭐가 있겠어요?” 양샤오산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해외여행도 겸사겸사 다녀올 수 있고, 한탕 벌 기회까지 있다니. 보스, 네 번째 인원은 누구로 정하셨나요? 샤오탕은 서대륙에 한 번도 못 가봤다던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자오징윈은 복도 끝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송양서국의 도련님이니 뭐니하는 건 겉포장에 불과하지. 저 사람들, 군부 소속이야.”
팡위는 순간 얼어붙었고, 양샤오산은 얼굴빛이 급격히 변하며 홱 돌아섰다. 복도의 크리스탈 벽 램프가 고요히 빛을 내고 있었다. 진홍색 카펫 끝, 스위트룸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오징윈이 계단을 내려가자 양샤오산이 바짝 따라붙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스, 설마 농담하시는 건 아니죠? 군부가 굳이 저희한테 의뢰할 필요가 있나요?”
“그건 그들만이 알고 있을 거야.”
팡위가 물었다.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자오징윈은 잠시 말을 멈추고, 기억을 더듬었다. “너희, 그 위 도련님이 신은 신발 봤지?”
양샤오산이 고개를 저었다.
“검은색 단화(短靴) 아니었나요?” 팡위가 말했다.
“맞아. 그건 일삼 제식의 평상복 군화야. 교급 1장교에게만 지급되는 정식 군화지.” 2
“그럼 그 위 도련님이 사실은 고위 장교라는 건가요?” 팡위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하지만 신분을 위장하고 있으면서 왜 군화를 신은 걸까요? 실수로 잘못 신은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실수일 리가 없어.” 자오징윈이 말했다. “시험일 수도 있고, 탐색이나 경고일 수도 있지. 아니면, 단순한 암시일 지도 몰라.”
“그럼 엘란티스로 심장 수술을 받으러 간다는 것도 거짓이겠군요?” 팡위가 자오징윈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의뢰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걸 뻔히 알고 계시면서도, 왜 굳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겁니까?”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자오징윈이 대답했다.
“하긴요. 이제 해외 사업을 확장할 시점이기도 하니까요. 그나저나 네 번째 인원은 누구로 정하신 겁니까?”
“린나(林娜)에게 연락해. 휴가는 끝났다고 전하고, 나중에 다시 보상해주겠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쯧.” 자오징윈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팡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물었다. “또 무슨 일입니까?”
“나는 왜 옷을 갈아입지 않고 그냥 온 걸까?” 자오징윈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
팡위는 자오징윈의 시선을 따라갔다. 식당 유리문에 비친 세 사람의 모습이 또렷했다. 두 사람이 정장을 입고 있는 가운데, 자오징윈의 셔츠와 면바지는 유독 가볍고 편안해 보였다.
“보스, 제가 분명히 갈아 입으라고 했잖아요. 안 갈아입은 건 보스라고요.” 양샤오산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오징윈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올리고는 더는 말이 없었다.
-
란도 호텔 2층의 객실. 훠웨이닝은 창가에 서서 불빛으로 환한 거리를 내다보았다. 조금 전 그 세 사람이 차를 타고 떠난 것을 확인한 그는 몸을 돌려,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인물을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스 처장님, 아까는 왜 굳이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고, 부러 자극까지 하신 겁니까?”
위예———혹은 군사정보국의 스추 처장. 그는 장갑을 다시 착용하고, 하얗고 매끈한 백자 찻잔을 들어 천천히 몇 모금 마신 후에야 대답했다. “그들의 한계를 시험해 본 겁니다.”
“당신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다소 성질은 있지만, 복종성은 그런대로 괜찮더군요.”
“자오징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스추는 훠웨이닝을 흘끗 보더니, 웃음기를 머금은 말투로 말했다. “보안국에 보고서를 올리세요. 더 경험 많은 의뢰 대상을 요청하겠다고요. 저도 전적으로 지지하고 협조하겠습니다.”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훠웨이닝이 말했다.
“보안국이 당신에게 부여한 임무는 저를 감시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 임무가 완수되든 말든, 저와 당신이 서대륙에서 죽든 말든 상관 없다는 뜻일까요?”
훠웨이닝은 다소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흑석공사에 의뢰한 이는 귀측 군사정보국 소속의 저우 국장님입니다. 저는 그분의 판단을 존중하며,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스추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훠 박사. 지금부터 선생님과의 단독 통화를 신청합니다. 방을 비워 주시죠.”
“하지만 저는 반드시……”
“보안국에 사실대로 보고하세요. 저는 이번 임무에 관해 선생님과 직접 논의할 겁니다. 기밀이 포함된 내용이라, 당신의 등급으로는 청취 권한이 없습니다. 보안국에서 이 점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직접 선생님께 문의하라고 하시면 됩니다.”
훠웨이닝은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망설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할 테니, 서로를 좀 더 알아두는 편이 좋을 겁니다.” 스추는 말했다. “첫 번째로 기억하실 점, 저는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침내 훠웨이닝이 타협하며 물러섰다. “다른 유의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급할 것 없습니다. 앞으로 차차 알려드릴 예정이라서요.”
훠웨이닝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고, 문을 닫으며 한 번 더 안을 슬쩍 훔쳐보았다. 스추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어깨에 흘러내렸고, 그로 인해 드리운 그림자가 얼굴을 가렸다.
문이 ‘딸깍’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방 안은 고요에 잠겼다.
스추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소파 팔걸이를 짚고 일어난 그는, 홍목 장식장 위의 전화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어서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송양서국에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수화기 너머로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이틀 전 서국에 <화은사고(华殷史稿)> 분책 한 권을 예약했는데요, 입고됐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스추가 말했다.
“어느 권을 예약하셨나요?”
“현윤황제 본기의 제2권, <서도중양(西渡重洋)>입니다.” 3
“입고되었습니다. 저희가 배송해드릴까요, 아니면 직접 수령하시나요?”
“방학원(放鹤苑) 쪽으로 배송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수화기 너머로 전화가 연결되는 미세한 전류음이 들렸다. 약 1분쯤 지나 중년 남성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우홍입니다.”
저우홍 상장(上将)은 군사정보국 국장이자 참모부 부참모장 4을 겸임하고 있는 인물이다. 5
“선생님……” 스추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우홍은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미 그를 만났겠구나?”
“예. 혹시 선생님께서 펑 처장을 직접 보내신 겁니까?”
흑석공사에 의뢰한 사람이 저우홍이라면, 그 펑 선생은 군사정보국 총무처 처장인 동시에 그의 부관장을 겸임하고 있는 펑보룬(冯伯伦) 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내가 큰 인재를 작은 일에 썼다고 말하고 싶은가? 하지만 지금 같은 시국에, 다른 사람을 보내는 건 내키지 않으니 말이지.” 저우홍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도 왜 그 사람을 이 일에 끌어들이신 겁니까?” 스추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그의 신분이 노출되면, 우리가 지금껏 들인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세상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일이 어디 있을까?” 저우홍이 말했다. “무엇보다 그는 확실히 유능한 젊은이야. 마음이 올곧고, 능력도 뛰어난 데다 교만하게 굴거나 조급해 하는 일이 없어. 일처리도 믿음직하지. 게다가 그의 아버지가 수년간 군수 사업을 해 오면서 서대륙에 쌓아온 인맥과 자원도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너희는 이미 서로 잘 아는 사이에, 호흡도 척척 맞는데, 그런 그보다 더 적합한 인재가 또 어디 있을까?”
“……”
“엘란티스는 용이 사는 깊은 못, 호랑이가 사는 굴이다. 너의 이번 임무는 그보다도 더 심상치 않지. 설마 내가 아무 용병이나 데려다 네게 붙여줄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그러다 발목이라도 잡히면 어쩌려고?” 저우홍이 농담조로 말했다. 6
스추는 가볍게 웃으며 맞받아쳤다. “선생님께서 그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 예전부터 그렇게 말씀해 주셨더라면, 관계가 그렇게 틀어지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 말에 저우홍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땐 장인이 사위를 보는 눈으로 봤으니, 눈에 거슬리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스추는 수화기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저우홍의 말투는 여느 때보다 살가웠지만, 그의 목 안에서는 왠지 모를 쓰라림이 올라왔다. “선생님께서 잘못 짚으신 걸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 사람은 절 원망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걸요.”
“그럴 리 없다.”
“아닙니다. 그 사람은 절 증오해야 마땅해요.”
“……” 몇 초간 이어진 침묵 끝에, 저우홍은 화제를 돌렸다. “보안굳 심문실에서 막 나온 참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말거라. 서대륙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푹 쉬어야 한다. 건강이 우선이야.”
“괜찮아요. 선생님 덕분에 그쪽에서도 눈치를 보느라 심한 고문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아직 보안국이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던 거다.” 저우홍은 말했다. “보룬 말로는, 그들이 네게 피로심문을 시도했다고 하던데?”
“며칠 잠에 들지 못했을 뿐입니다.” 스추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물었다. “펑 처장이, 혹시 그들이 제게 정체불명의 약물을 주사한 것도 보고했나요?”
“방금 확인했다. 일명 ‘자백제’라고 하더구나. 지금 너를 감시하고 있는 훠웨이닝이 골로 제국 의학 실험실에서 가져온 약물이지. 국내에는 단 한 병뿐이었다.”
“정말 운이 좋았네요.” 스추는 서늘하게 웃었다.
“당시 상황은 기억하느냐?”
“기억나지 않습니다.” 스추는 눈을 힘껏 감았다. “환각에 빠졌던 것 같고, 모든 게 혼란스러웠거든요.”
저우홍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걱정 마라. 보안국의 반응으로 봐선, 네가 기밀을 누설하진 않은 것 같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스추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선생님, 마지막 심문 기록 사본을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기밀 내용은 없을 테니, 지금 당장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언제가 되었든, 나중에라도 괜찮으니 부탁드립니다.”
“왜 그러지?”
스추는 짧은 침묵 끝에, 조용히 말했다. “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 制式;제식. 일정하게 정해진 양식을 뜻한다. [본문으로]
- 校级;교급. 중국 인민해방군의 중급 장교를 뜻한다. 중급 장교: 대교, 상교, 중교, 소교로 나뉨. 스추의 직책인 상교(上校)는 ‘연대장 또는 사단급 부서 책임자’이다. [본문으로]
- 西渡重洋; 서도중양. ‘서쪽 바다를 건너다’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 上将;상장. 군 계급 중 최고 등급, 장군급 중 최상위이다. 주로 군사정보국 국장, 참모부 고위직, 국구 사령관 등의 직책에서 볼 수 있다. 계급장: 금색 월계잎 및 금색 별 세 개. [본문으로]
- 副参谋长;부참모장. 보통 상장급 또는 중장급 장성이 맡으며, 총참모장(작전 지휘 및 전략 기획의 최고 책임자)을 보좌하면서 정보 및 작전, 후방지원을 책임진다. 군사정보국 국장을 겸임하는 경우, 군 내부의 정보와 첩보 및 전략 중심에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참모부(参谋部)란? 중앙군사위원회(中央军委)에 직속된 핵심부서로, 전체 인민해방군의 작전 지휘 및 전략 계획을 총괄하는 기구임. [본문으로]
- 龙潭虎穴;용담호혈. 용이 사는 못과 호랑이 굴, 지세가 매우 험준한 곳을 뜻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