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그는 아무런 관계가 아닙니다.”
5월 14일, 명검 대회가 밝았다.
내려쬐는 뙤약볕은 여름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그야말로 환하며 강렬하다. 척조석이 연무장에 발을 들여놓자, 몇몇 사람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조한 낯을 하고 있었는데, 그를 보고 크게 실망하더니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 설락은 과연 더는 척조석을 부르지 않았다. 그 자신도 언제 도착했는지 알 수 없으나 관망하기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척조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의 옆에는 뜻밖에도 강리와 조월이 서있었다.
이곳 연무장은 어제 펼쳐진 신예 시합 때보다 매우 활기가 넘쳤다. 결국 불의검과 관계된 일이다. 아무도 관여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높은 무대 위에 더 이상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무대 아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차림새를 자세히 뜯어보면 각 대문파를 뚜렷하게 구별해 낼 수 있다.
“무슨 일 있나?” 척조석이 물었다. 그는 개막 시간 끝자락을 밟고 도착했다. 벽 바깥에서 칼과 병기가 맞붙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무대 위가 텅 비어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한쪽에 위민이 홀로 서있었고, 자세히 보니 낯빛이 무거웠다.
설락은 발끝을 멍하니 바라보는 조월을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정 대협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
불의검이 없다.
척조석은 나지막이 웃었다. 짐작했던 바다. 다른 사람들은 되려 인내심을 전부 소모한 듯했다. 불평하는 소리에 의심이 섞이더니, 열기가 점점 거세졌다.
“위 장주, 우리에게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 않으십니까?”
“엄청 뻐기는군! 날이 이리 더운데, 설마 우리가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리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
“여러분, 조급해 마시지요, 조급해 마세요! 이미 사람을 보내 재촉하라 일렀습니다!” 위민은 연거푸 사죄했고, 뒤이어 가복이 황급히 뛰어오는 것을 보고는 냉큼 소리를 질렀다. “사람은?”
“어르신, 없습니다!” 가복이 먼 곳을 사이에 두고 소리쳤다. “장 내 전체를 다 뒤졌지만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 목소리는 우렁차게 군중을 때렸다. 그와 동시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위민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묻혔다. 연무장은 삽시간에 끓는 죽이 솥을 터뜨린 것처럼 변해갔다.
“제기랄! 내가 진작에 믿을 수 없다고 했잖아. 정 대협, 정 대협, 그까짓 게! 보물을 얻자 그대로 밤을 틈타 토낀 거야!”
주변에서는 차가운 조롱과 멸시가 터져 나왔다. “무슨 참된 군자고, 좋은 인정과 충직함인지. 알고 보니 이전의 이익이 크지 않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거구만.”
어떤 사람은 바로 뛰쳐나갔다. 마치 문을 나서자마자 즉시 정거한을 잡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세가 명문은 그나마 침착한 축에 속했는데, 제자 몇 명만 보내어 따라나서게 하고, 나머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소식을 기다렸다.
“불의검을 정거한에게 넘겼지. 역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아래에서. 그렇기에 오늘 무슨 일이 발생해도, 나는 전혀 놀랍지 않아.” 척조석은 수수방관하며 큰일을 꺼리지 않았다. 그가 막 웃으려는데, 설락이 힘껏 소매를 잡아당겼다. 뒤이어 옆쪽을 슬쩍 가리켰다.
강리도 조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땅바닥을 응시했다. 신발코에는 흙먼지가 묻어났고, 얼굴은 목각인 양 무표정하다.
바로 이때, 한 가복이 문으로 뛰어들었다. 다만 인파에 밀려 똑바로 서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어쩔 도리가 없어 소리를 질렀다. “찾았습니다! 어르신, 찾았어요. 장 외 숲 속입니다!”
주위가 일순 굳었다. 가복은 힘겹게 자리를 잡았으나, 땀에 흠뻑 젖은 데다 숨을 헐떡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위민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가 언성을 높여 물었다. “사람을 찾았다고? 한데 왜 데려오질 않았느냐!”
가복은 군중을 뚫고 나왔다. 하마터면 땅바닥에 쓰러질 뻔한 그는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소리쳤다. “죽었어요!”
조월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위민은 다급히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무대 가장자리에 섰다. “그렇다면 검은?”
가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봤습니다. 없어진 것 같더군요!”
위민의 몸이 휘청였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후에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장 외로 간다.”
이번에는 각 대문파도 기다릴 수 없었기에 서둘러 나갔다. 척조석과 설락이 마지막을 장식하려는데, 옆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난 가지 않을 거야!”
조월은 뒤로 물러나 강리를 노려보았다. 이는 겉은 강인하나 속은 나약한 겁에 질린 작은 짐승처럼 보였다. 강리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막 입을 벌리려는데, 조월이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몸을 틀었다. 그를 쳐다보지도 않으려는 것 같았다. 1
남겨진 강리는 갈팡질팡하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설락이 참지 못하고, 강리에게 속삭였다. “너는 네 사부를 따라가거라, 돌아온 뒤에 그녀에게 알려주렴. 내가 남아서 지키고 있으마.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야.”
강리는 설락을 한 번 쳐다보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그는 척조석을 뒤따랐다.
집의장은 거의 한 구석을 독점하고 있어, 주위에 거주하는 사람이 드물다. 더구나 몇 리 밖에는 울창한 푸른 녹림이 자리 잡고 있다. 머리 위로 벽옥 같은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머리 위에서 뒤얽히며 만들어진 그늘은 약간의 서늘함을 더해주었다. 2
정거한은 짙은 그늘 아래에 누워있었다. 옷은 본래의 색을 구분해 내기가 어려웠고, 온통 피에 흠뻑 젖어 짙은 갈색이 되었다. 심지어는 몸 아래의 풀과 흙에도 짙은 피비린내가 깃들었다. 그의 시체는 참혹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전신의 열두 개의 상흔은 들쑥날쑥하게 그어졌고, 하나같이 몸을 뚫을 듯했다. 마치 손을 쓴 사람이 그와 큰 원한을 맺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고통을 찾아볼 수 없고,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온몸의 더러운 피와 살점을 돋보이게 하여, 도리어 말할 수 없는 기괴함이 느껴졌다.
강리는 척조석과 한쪽 구석에 섰다. 그들은 청산파의 심 이공자가 짧은 비수 한 자루를 꺼내, 시체에 붙은 옷을 가벼우나 신중한 동작으로 조금씩 베어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손동작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숲 바깥의 가로막힌 사람들마저 고개를 기웃이며 무언가를 똑똑히 보려고 애썼다.
방금 따라온 한 무리의 사람들 중에는 물고기와 용이 한데 섞여 있다. 시끄럽고 떠들썩한 데다 차마 들어줄 수 없는 욕설이 간간이 들렸다. 과연 천하에 이름을 떨친 대협이 도대체 어떠한 말로를 맞이하는지 보고 싶은 것 같았다. 3
청산파의 수제자이자 장문의 장남인 신심사(沈慎思)가 불쑥 몸을 돌려 칼을 뽑아 들었다. 이에 차가운 빛이 나는 듯이 스쳐 지나갔고, 군중들이 급히 물러섰다. 뒤이어 굉음과 함께 굵은 나무 한 그루가 잘려 길 위로 쓰러졌다.
심신사는 나무줄기를 밟고 올라서서, 칼을 든 채 노여워하며 말했다. “사람이 살해당한 틈을 타, 무슨 어중이떠중이들이 감히 쓸데없는 공론을 펼치다니요? 사람은 한 덩이의 피와 살에 지나지 않으나, 그는 공명정대 4했습니다. 희희낙락 따라와서는 뭣들 하는 겁니까, 이게 기루 5에서 당신들에게 보여주는 여흥거리처럼 느껴지시나 봅니다?” 6
그의 눈빛이 찬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움츠러든 사람들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강호의 큰 일은 산하맹의 맹주에게 위임하는데, 산하맹을 이룬 귀운산장, 청산파, 광금종 세 가문은 맹주조차도 독단적으로 자결할 수 없다고 결의한다———이는 과거 초대 맹주였던 강록명이 정한 규칙이었다.
산하맹이 설립된 지 36년이 흘렀다. 강호의 많은 사람들은 점차 3대 문파의 명성에 익숙해졌으며, 충분히 신뢰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한 무리에 우두머리가 없어 일이 성사되기 어려울 때마다, 3대 문파에 속한 누군가가 그 자리에 있을 경우 자연히 진행을 맡게 되었다. 7
청산파 심 장문은 슬하에 삼남을 두었다. 장남 심신사는 이미 문파의 대부분의 사무를 맡았으며, 강호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광금종에서 온 임광가(林旷歌)는 스무 살 남짓의 아가씨인 데다, 자주 하산하여 경험을 쌓지 않았기에, 이와 같은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장면에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입을 연 이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위민도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섰다.
이공자 심지언(沈知言)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자발적으로 나아가 시신을 검사했다. 심신사는 사람을 명하여 구경꾼들을 해산시키는 등 사방을 지켰다. 동시에 숲에서 단서를 찾아볼 것을 분부했다. 그러고 나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셋째 동생이 눈에 들어왔다.
삼공자 심단행(沈端行)이 기대하며 말했다. “큰 형님, 그럼 저는……”
심신사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저리 가 있거라, 네 이형이 일하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말이야.”
심단행은 “에잇” 소리를 내더니, 광금종의 임 아가씨 옆으로 굴러갔다.
비수가 옷감을 찢으며 나던 작은 소리가 홀연히 멈췄다. 심지언은 한 손으로 옷자락을 벗기고 옅은 핏물을 머금은 물건을 살살 꺼냈다. 어렴풋이 접힌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언은 녹림의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햇볕에 잠시 비춰본 다음 말했다. “편지 같은데, 아쉽게도 피로 얼룩진 탓에 억지로 펼친다고 해도 내용을 알아보긴 어려울 것 같아요.”
“만약 편지라면, 틀림없이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과 관련이 있을 게다.” 심신사는 다가와서 보았다. “너는 아직 그것을 갖고 있느냐, 핏자국을 없앨 수 있겠어?”
심지언은 저도 모르게 멍해졌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번 해볼게요.”
말을 마친 심지언은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고, 정거한의 옷자락에서 피가 묻은 옥패 하나를 만져냈다. 이후로는 더 찾아내지 못했다. 조월검도 그와 함께 안정적으로 피바다에 쓰러졌다. 검집에서 뽑아내자 맑은 검신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심지언은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저었다. 숲을 수색하러 갔던 제자들도 서둘러 돌아왔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을 보니, 불의검을 잃어버린 것이 자명했다.
검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이는 예상한 일이었다. 심신사는 위민과 상의한 후, 사람을 보내 정거한의 시신을 집의장으로 옮기고, 이어서 자세히 추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많은 사람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척조석은 그제야 비로소 곁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던 강리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무언가 알아차렸느냐?”
“시신의 경직 정도로 보아하니, 어젯밤에 죽었습니다. 검신이 깨끗해요. 그의 몸에도 싸움의 흔적은 없었고, 열두 개의 상흔만 있을 뿐이고요.” 강리는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전혀 검을 뽑지 못했어요.”
상대방이 이렇게 대단하다고?
만약 일격에 목숨을 잃은 것이라면, 정거한이 손을 쓸 겨를이 없었을 테니 그리 기이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무공 수준에 이어지는 열두 차례의 중상을 입은 상황에서, 어떻게 조금도 반격할 여지가 없을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그는 심한 출혈로 목숨을 잃은 것에 반해, 표정은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큰 꿈에 빠진 것 같았다.
척조석은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손을 쓸 수 없었던 걸까, 손을 쓰기 싫었던 걸까?”
강리는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고, 내색 않고 말했다. “무슨 뜻이죠?”
척조석은 잠시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웃었다. “정말 총명하군. 단번에 알아듣다니.”
“당신이 하려던 말은……”
“하고 싶은 말은 없어.” 척조석은 그의 말을 끊고, 발을 돌려 녹림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 너는 그 소녀와 벗이니, 마음에 두지 않으면 돼.”
강리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주시했고, 한참 후에야 겨우 뒤따랐다.
조월은 척조석이 머무는 정원에 기다렸다. 이에 설락이 그녀와 함께 중랑에 앉았다. 어떤 말을 오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월의 얼굴은 맑게 개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너무 늦었어. 다시 이렇게 늦는다면, 우리는 두 사람의 식사를 기다릴 생각이 없을 거예요.”
마치 척조석과 강리가 그녀의 부친의 시신을 살피러 간 것이 아니라, 답청을 다녀오기라도 한 것처럼.
척조석은 전혀 개의치 않고, 중랑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이러니 확실히 좀 배가 고프네.”
강리는 아직 정원에 서있었다. 그는 설락과 시선을 마주한 뒤에야, 천천히 조월에게로 시선을 떨궜다. 입을 열지 말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문 밖에서 갑작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눈을 돌리는 사이, 상대방은 이미 정원에 들어섰다. 검을 든 제자들이 둥글게 에워싸며 한 갈래 빈틈을 남겨두었고, 그 틈으로 심신사가 앞장서서 들어왔다. 그런 그를 한 무리의 사람이 뒤따랐다.
“심 공자, 무슨 일이신지요?” 깜짝 놀란 설락이 일어났다.
“두 분 실례합니다. 땅을 빌려 사람을 찾을 뿐입니다.” 그의 형 뒤에서 나온 심지언이 미안한 기색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런 다음 설락의 옆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조월 낭자?”
조월은 일찌감치 경계하며 일어섰으나, 영문을 몰랐다. “저예요.”
“실례지만 정거한 정 대협과는 어떤 관계였나요?”
조월은 시원하게 답했다. “나와 그는 아무런 관계가 아닙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았다. 하나같이 표정이 복잡 미묘하다. 말문이 막힌 심지언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어젯밤 당신이 정 대협과 함께 장외 녹림에 가기로 약속했습니까?”
조월은 멍해졌고, 이어서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죠? 당신들은 내가 그 사람을 죽였다고 의심하나요?” 그녀는 차게 웃었다. “내가 그 사람을 죽일 이유가 뭐 있다고?”
“검을 빼앗고 한을 풀고. 이유는 많지 않습니까?” 심신사가 말했다.
조월은 눈을 부릅뜨자, 심지언은 다급히 큰 형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고, 손을 내밀어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를 꺼내어 펼쳐 보였다. 바로 시신에서 거둔 편지였다. 그가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알 수 없으나, 종이에 묻은 핏자국이 씻겨나가 옅은 붉은기만 남았다. 먹자국은 조금 번졌지만 내용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하다.
“편지에는 당신이 그와 자정에 숲에서 만나는 것으로 쓰여있었는데,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조월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자백하기를 기다렸고, 심지어 설락마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리의 시선 끝이 조용히 중랑 아래로 미끄러쟜다. 척조석은 여전히 한가롭게 앉아있었는데, 마치 연극이라도 보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 그가 녹림에서 하려던 말은, 바로 조월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의 무공이 정거한에게 열두 번이나 중상을 입히고, 심지어 그가 검을 뽑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로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반격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려 한 것, 그저 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걸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라는 쪽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하물며 사람을 죽이는 데는 단칼로 목을 그으면 될 일이다. 굳이 몸을 만신창이로 찔러 피범벅을 만들 이유가 있을까?
그 사람은 틀림없이 그를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리는 문득 정거한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토록 침착하고 조용한 얼굴. 그 속에서 그는 한 줄기 애도의 마음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월이 깊게 숨을 들이쉰 후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 편지는 분명 내가 쓴 게 맞아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죽이진 않았어요! 어젯밤 나는 아예 녹림에 가지 않았을뿐더러, 그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다고요!”
심지언이 물었다. “당신이 편지를 써서 불러냈으면서, 왜 가지 않았나요?”
조월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 사람에게 남긴 말이 떠올랐거든요. 그걸 전해주려고 했는데, 막상 편지를 주고 나니, 여전히 내가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녀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강리에게로 발을 틀었다. “어젯밤, 나는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잠이 오지 않았고, 그래서 창가에 멍하니 앉아있었어. 강리, 너는 그때 책을 읽고 있었잖아. 고개를 들면 창에 비친 내 그림자가 보였을 텐데! 너 나간 적 없지? 그렇지?”
강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월은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말해 줘!”
그러나 강리의 입이 열리기 전, 심지언의 뒤편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제가 압니다!”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위민 역시 뜻밖이라는 듯 아들을 힐끗 보았다. “네가 뭘 봤다는 거냐?”
위가는 아버지가 별다른 꾸지람을 하지 않자, 사람들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앞으로 나섰다. “어젯밤, 조월 낭자가 방 안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는 확실히 압니다.” 그는 곧장 손을 뻗어 강리를 가리켰다. “그는, 거기 없었습니다!”
- 色厉内荏; 색려내약. 외모는 다부지지만 마음은 무르다, 겉으로는 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약하다는 뜻을 가진 성어이다. [본문으로]
- 碧玉; 벽옥. 푸른빛의 고운 옥을 뜻한다. [본문으로]
- 鱼龙混杂; 어룡혼잡. 물고기와 용이 한데 섞여 있다는 뜻으로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이 마구 뒤섞여 있다는 속뜻을 품고 있다. [본문으로]
- 阿猫阿狗; 아묘아구. 어중이떠중이를 뜻한다. [본문으로]
- 光明磊落; 광명뢰락. 정정당당하다, 공명정대하다, 떳떳하다. [본문으로]
- 勾栏; 구난. 기루 또는 기생집을 뜻한다. [본문으로]
- 群龙无首; 군룡무수. 뭇 용에 우두머리가 없다는 뜻이며,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지도자가 없다는 속뜻을 지님. [본문으로]